진보신당, 이제 그만 내려오라” | |||||||||||||||||||
[투고] 대중운동과 계급정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나? | |||||||||||||||||||
나는 ‘지못미’ 당원이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논쟁의 국면에서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의도된 실수는 상대를 자신의 논지에 맞게 극단적인 포지션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심상정이 던지는 문제의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모든 것을 접고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에 투항하자는 논리인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상정의 길이 틀렸다는 주장은 현실을 모르는 극단적 원리주의인가? 역시 아닐 것이다. 밝혀두는 바, 나는 이하의 글에서 “배타적 계급 정당”, “폭력 계급 혁명”, “국가 사회주의”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 강력한 대중운동과 대중 조직 없는 사회민주주의적 변화가 가능한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강령은 대략적으로 “사회민주주의”로 수렴될 수 있다. 그런데 브라질,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사회민주주의 모델로 제시되는 그 모든 사회. 그 어디에 강력한 “계급적 대중 운동”, “계급적 대중 조직” 없는 사회가 있던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민주의‘적’ 정당들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엄호와 협력 속에 사회 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계급적 대중 운동 뿐인가? 성소수자를 비롯한 각종 소수자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환경운동, 지역운동, 하다못해 종교적 색채를 띤 사회운동까지. 이른바 사민주의 정당들은 이런 대중운동과 대중조직과의 결합을 통해서야 사회민주주의적인 사회변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오직, 미국과 같은 사회만이 다양한 대중운동과 대중조직들의 에너지를 보수 양당 체제로 수렴하며 사회적 변화를 봉쇄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전환은 “강력한 대중운동과 대중조직, 특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해진다. 단순히 운동과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정치에 개입하는 경험과 전통, 역사와 제도. 그리고 그 기반 위에 선 강력한 노동운동과 대중운동. 정당으로 표현되는 정치 운동은 그러한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할 때 작동 가능하다. 전통적인 계급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여도, 그것이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이 갖는 중요성을 폐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브라질이 그렇고, 프랑스가 그렇고, 스웨덴이 그렇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계급적 대중 운동은 물론 이른바 중간 계급적 사회운동마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해방 이후, 정치 공간은 한민당과 자유당 같은 보수 정당들에 의해 독점되었고, 87년 이후 시민운동이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한국 전쟁 이후 형성된 보수 우익 천하에서 체제 안으로 수렴되거나, 정치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 정치성을 거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해야할 계급적 대중운동은 최소한의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했으며, 노동조합은 전두환 정권 이후 형성된 기업별 노조 체제 안에 봉쇄된 채 고립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사회적 발언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를 금지 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 스스로 금기와 터부를 내면화하며 영속되고 있다. 대중의 일상적 삶은 향우회부터 관제 시민운동까지 체제 친화적인 운동과 조직으로 지배되어 있으며, 체제에 반하는 모든 발언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된다. 대중은 정치로부터 배제되고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은 대중 스스로의 탈정치와 비정치를 통해 완성된다. 그러니까 대중정치, 계급정치 없는 정치는 한국 사회의 구조이자,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진보정당 운동은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지원과 협력 없는 고독한 싸움일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과 전농 등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계급적’ 대중운동서의 시민권은 여전히 보류 중이다. 문제의 근원을 민주노총이나 전농 각각의 주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주체의 문제는 언제나 첫 단추지만, 이를테면 노동운동의 문제는 한국 사회 일반의 변화 속에서 해결되는 것이지, 민주노총 지도부 몇몇 혹은 그 자신 한국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인 조합원 개개인의 변화를 통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사례가 이를 반증한다. 브라질 PT 당의 모태며, 중심 기반은 강력한 금속노조다. 그러나 강력한 금속노조와 그 성원은 브라질 사회의 다양한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의 전통 속에 서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유별난 게 아니다. 브라질 PT 당의 지지자의 다수가 중간계급이란 지적도 논점 이탈이긴 마찬가지다. 브라질 PT 당의 지지자가 모두 중간계급인 것도 아니며, 중간계급의 PT당에 대한 지지는 사실상 계급 연합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강력한 대중운동과 조직이며, 특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조직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운동과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며, 대중 스스로의 자기 조직과 정치적 의사표현이라는 전통과 경험, 제도에 기반한다. 과장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노동조합 없는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심상정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자고 한다 심상정의 문제제기는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매번 “뻥”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조와 현실의 반영이다. 진보정당에의 지지가 비판적 지지에 가로막히는 것은 보수 양당 체제 때문이며, 이는 정치 제도의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구조 탓이라는 것이다. 심상정은 이른바 노동운동 중앙파 출신이다. 그는 민주노동당 창당에 즈음하여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흐름 속에서 당운동에 결합한 노동운동가다. 그런데 이 민주노동당을 낳은 합법정당 운동을 시작한 것은 인민노련이며, 최초의 공식 선언이 주대환의 신노선이었다. 그리고 주대환은 이미 오래전부터 심상정과 유사한 주장을 해왔다. 여기에 심상정이 몸을 실은 것이다. 민주노총-민주노동당 양날개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당 운동을 만들어낸 세력이 이제 그 전략을 한계를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심상정의 선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87년 이후 지속된 합법 정당을 통한 독자적 정치 세력화라는 정치운동이 스스로의 한계를 자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심상성의 문제제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내 식대로 심상정의 문제제기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대중운동 없는 정치 운동” 최소한 “체제 저항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가 과소 결핍된 정치운동”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라는 두 개의 날개 ‘만’으로 집권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심상정은 이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심상정이 제시한 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심상정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이를 공식화하자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정에게 묻고 싶다. 심상정의 전략이 진보-개혁 정당의 당 대 당 통합을 통한 전략적 제 3당 건설, 장기적으로 보수 양당 체제의 해체 혹은 민주당의 대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정치운동 수준에서의 전략 말고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문제는 어떠한가? 정확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 정치의 공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정치에서 배제된 절대 다수의 대중은 어떻게 정치화 되는가? 최소 700만에 달하는 저소득 계층은 어떻게 정치화할 것인가? 비정규직 노동자와 최저임금노동자, 영세자영업자에게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만들 수 있나? 복지정책으로? 선거를 통해서?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개혁과 변화를 통해?
왜냐하면 그 촛불 당원은 결코 하나가 아니며, 지난 1년 반의 과정 속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으며 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상정의 선언 이후 벌어질 논쟁은 이러한 분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당원과 신당원과 같은 과도하게 규정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촛불, 시민, 연합? 필요한 것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 즉 계급 연합이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배타적 계급 정당” 즉, 노동계급만으로 구성된 정당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한 사회변화를 부정하는 것 역시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한 것은 권력에 맞서 겨우 “시민”이라는 주체만이 서 있는 상황, 계급적 대중운동과 조직은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한 것은 물론, 대중정치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 이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보정당은 중간계급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현 시기, 이른바 촛불로 상징되는 “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심상정을 비롯한 일부의 주장은 이 시민들을 인정하면서 실은 그들이 하나가 아님을,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묵과하고 있다. 정치적 지지가 계급적 지위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선거와 제한된 시민사회 공간을 통해 구성되고 호명되는 이른바 국민과 시민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균열이 존재하며, 다양한 계급적, 계층적 분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체제는 이들을 체제 친화적이며 탈계급적이며, 최소한 중간 계급적 주체로 제한하려 한다. MBC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해도, 제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하지 않는 이른바 ‘선택과 배제 전략’은 문민정부 이후 항상적으로 존재해온 전통적 전략이다. 이런 상황에서 탈계급적 관점에서의 시민을 지지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 계급배제, 대중배제 정치를 영속화하는 것일 수 있다. 중간 계급의 지지를 얻는데 급급해 중간 계급의 변화와 분화를 포기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중간계급과 하층 계급의 연대와 단결, 연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연합을 말하지만 실은 “중간 계급 간의 연합”으로 결국에는 “정치화된 그들만의 정치에 국한된 연합”을 주장하는 것이다.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의 공백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는 한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촛불과 시민은 결코 고정불변한 계급이 아니며, 영원히 보수 양당 체제에 갇힌 주체도 아니다. 그들 내부에서도 정치적 지향과 계급적 지위에 있어 다양한 분화가 있고,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계급과 연대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주체다.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이 해야 할 일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이다.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입장과 계획 이제와 나는 반성한다. 나는 과거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른바 자주대오와 당을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아는 정당운동의 개념에 입각할 때 너무도 상이한 노선을 가진 두 세력이 함께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합법정당 노선을 개량으로 폄하한 것을 반성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제와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합법정당 노선이 옳았다고 평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반성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반성해야할 것은 정당운동을 계급적 대중운동, 대중 정치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던 점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 운동의 수준에서 어떤 당이냐 ‘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뿌리내릴 것”이냐며, 이 과제를 성공하지 못하는 한 어떠한 방식의 진보정당 운동이라 해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준비하고 있는 진보신당 왼쪽의 정치세력의 시도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조직 노선이 무엇이든 간에 다양한 정치운동의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계급대중을 정치화시키는 데 주요한 일익을 전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어쩌면 현 시기에 더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입장과 계획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2000년 민주노동당의 재창당 운동과 유사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이른바 제 2창당 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왜냐하면 2000년의 재창당 운동은 좌우 동거라는 커다란 그림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의 제 2창당은 오른쪽을 뺀 왼쪽끼리의 제 2 창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0년의 재창당은 한국사회의 제 운동진영이 독자정치세력화라는 큰 흐름에 함께 복무한다는 대의와 명분, 그리고 비전이 있었지만 2008년 진보신당의 제 2창당은 “변화해야한다”는 주장만 있었을 뿐 명분도 비전도 없었다. 나는 진보신당이 또 다시 제 2창당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 정치의 형성”을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정파적, 정치적, 노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의 과제와 지향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제 2창당을 넘어 최소한의 연대와 연합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지 않을 때 진보신당은 결국 심상정의 제안한 길로 가거나, 혹은 심상정의 길은 아니지만 그다지 다르지도 않을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는 말이다. 진보신당, 이제 그만 내려오라 (나는 전진 토론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따라서 토론 내용을 알지 못한다. 또한 사민모임 토론회의 경우 토론문이 공개되지 않아 별도의 입장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전진의 지난 주 토론회에서 장석준은 ‘비’노동 전략을 제안했다. ‘비’정규직 노동자과 노동자가 될 ‘비(be)’노동자, 노동에서조차 배제된 가사노동 등의 ‘비(非)’노동자를 위한 정치.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비’노동 전략에는 여전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위해 진보정당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관점과 계획이 빠져있다고 본다. 나는 장석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장석준이 그 공백을 채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구조 안에서 ‘비’노동 전략 역시 탈계급적 공간에서의 탈계급적 정치활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지향과 계획을 자기 과제로 위치 지워지울 때에만 ‘비’노동과 같은 의미 있는 전략은 성공하게 될 것이다. 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렇다. 진보신당이여. 이제 그만 허공에서 내려와 대지에 발을 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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