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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략당과 남민전
vicsteel
2009. 11. 5. 00:31
이제는 말할 수 있다(3) - 전략당과 남민전
권재혁, 이재문, 신향식 복권은 6·15 실현에 달려있다.
김지형(민족21기자 · 현대사자료실 회원)
인민혁명당(인혁당), 통일혁명당(통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1960∼70년대 한국사회운동의 대표적 비합법·지하운동조직들이다. 이 흐름 속에서 활동해온 김병권(81)선생. 전략당과 남민전에 직접 참여한 그의 본격적인 1960∼70년대 사회운동 증언.
4·19시기 사회당, 민자통 활동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누구일까?
사단법인 민족화합운동연합(이하 민화련) 상임고문 김병권(81)선생이다. 현재 그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과 통일연대(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의 고문이기도 하다.
김병권 선생이 이처럼 합법적으로 통일운동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째다. 1990년 범민련활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이른바 '비합(법)운동'만 했다.
한국현대사에서 그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이하 전략당)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관련자로 알려져 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인민혁명당(인혁당)과 함께 1960∼79년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비합법 지하운동조직들의 중심에 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노구를 이끌고 사비를 들여가며 '6·15공동선언 실현' 선전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김병권 선생을 만나 비합법운동과 합법운동을 넘나들며 통일운동에 매진해온 삶을 들어보았다. 1960∼70년대 사회운동의 서막을 연 4·19항쟁 시기부터 얘기를 시작했다.
4·19시기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4·19직후엔 사회당 대구지부에서 활동했습니다. 민자통에서도 일했지요."
사회당은 4·19직후에 결성된 혁신정당이다. 1950년대 횡행했던 '북진통일론'대신 4·19직후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던 당시 사회운동세력의 총집결체 역할을 했던 정당이다.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은 사회당 등이 중심이 돼 당시 정당,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조직이다.
4·19이후 분출한 통일열기는 채 1년을 넘지 못하였다.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사회운동의 '암흑기'가 왔기 때문. 과거 통일운동가들에게 당연한(?) 결과로 여겨졌던 체포와 투옥. 선생의 감옥살이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대구역 아펭서 혁명검찰부에 체포돼 대구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당했다. 그때의 회고다.
"유치장에 들어가니 벽면에 일제때 독립운동가들이 써놓은 글귀가 그대로 있더군요. '일본놈들 물러가라' '조선은 조선 사람의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후 대구형무소에 수용됐는데 그때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경근(당시 민자통 대구경북위원장) 선생과 그 분의 조차인 안민생 선생도 들어와 계시더군요. 또 가슴 아팠던 일은 안민생 선생의 아들이 당시 경북대 학생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역시 그 곳에 잡혀와 있었던 일입니다. 3대가 한 감옥에 갇혔단 말입니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가 그해 12월 8일 석방됐다.
석방된 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대구로 내려와 동지들과 혼탁한 정국의 앞날을 논의하며 지냈습니다. 이일재, 이권, 조만호, 이승춘, 권오봉, 이갑득 씨등이 그때 모여서 시국을 의논하던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가 권재혁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권재혁. 그는 김병권 선생이 연루된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핵심인물이다. 1968년 8월 발표된 '전략당 사건'으로 유일하게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김병구너 선생의 생각은 각별하다.
"당시 남쪽 사회운동진영 가운데 그만큼 열정적이고 탁월한 활동가는 없었다고 봅니다."
권재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병구너 선생을 통해 권재혁에 대해 비로소 상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권재혁 선생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5·1이후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규제가 풀린 뒤였으니까 1963년 9월쯤입니다. 4·19시기 혁신정당 중 하나였던 통일사회당계 고정훈, 윤길중 등이 그 때 '민주사회주의동지회(민사동지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청계천인가 을지로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그 곳에서 시국문제와 관련해 세미나를 열곤 했어요. 그래서 이일재하고 같이 갔는데 마침 권재혁 씨가 〈미국 경제현황 및 후진국 개발문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미국측의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얘기였는데 설득력 있는 논지를 폈으며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습니다."
김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권재혁 선생은 1925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타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그후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4·19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길에 올랐다는 것.
그는 오자마자 곧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취직했다.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이한림 장군과의 친분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5·16이 난 후 이한림은 박정희와 사이가 벌어졌다. 5·16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
육사에서 나온 이한림은 수산개발공사로 옮겼고 권재혁도 그 곳의 영업 책임자로 따라갔다. 이 곳에 적을 두면서 권재혁 선생은 김병권, 이일재 등과 차츰 '동지적 관계'를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탁월한 활동가 권재혁
1968년 중앙정보부(중정)에 의해 발표된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권재혁 선생을 중심으로 한 이 조직체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당시 우리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냐하면 사건 당시 중정에 압수된 물품 중에 권재혁 씨가 세미나 때 발표한 논문이 있었어요. 그 논문 제목이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입니다. 그 제목을 따서 우리 조직 명칭이라고 갖다 붙인 것이죠."
그렇다면 아직 지하정당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는 말씀인데 당시 조직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고 보십니까?
"당시는 서클활동 수준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향후 서클들의 연합조직을 만들어서 차츰 당조직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있었지만 당시는 그렇게 까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더라도 내부에서 스스로 부르는 이름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권재혁 씨가 동학의 포(包)조직원리를 우리 조직에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서클들을 '포'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지역의 경우 서울포, 대구지역의 경우 대구포등으로 불렀죠."
당시 어떤 포들이 있었습니까?
"중앙포, 대구포, 부산포, 청량리포, 성동포, 학생포 등등이죠. 중앙포는 권재혁 씨가 책임자이고 이일재(조직책임), 이강복(이일재의 삼촌, 와세다대 출신, 국제정세 분석담당)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포에는 반드시 현장 노동자가 1명 이상이 포함되는 것이 조직 구성의 원칙이었습니다. 또 포원이 6명이 되면 분열해서 또 다른 포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당시 성동구포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 조직체에서 김병권 선생은 조직생활을 하면서 자금조달의 일부를 담당했다고 밝혔다. 당시 대구에서 위생도기 사업을 하면서 활동 자금을 조달했다는 것. 그러나 자신이 조달한 비용은 전체의 20% 정도일뿐 나머지는 권재혁 씨가 조달했다고 한다.
1968년 당시 중정에 의해 조직에 소속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체포됐다는 게 김선생의 증언이다. 그러면서 서류함 깊은 곳에서 낡은 문서를 꺼내 놓는다. 1969년 3월자로 된 서울지방검찰청의 항소이유서 원본이다. 여기에 나오는 피고인 명단을 살펴보자.
이강복, 이형락, 노정훈, 김봉규, 박점출, 조현창, 김병권, 오시황, 나경일, 김판홍. 권재혁과 이일재의 이름이 안 보이는 이유는 두 명의 경우 1심에서 최고형인 사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검찰이 항소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통혁당과 통합결정
이형락은 대구포 소속으로서 남로당출신이다. 노정훈은 학생 책임자였으며 4·19시기 통일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김봉규는 청량리포 책임자였고 박점출은 연합노조에 관여했다. 조현창은 부산포 소속으로서 당시 금성재벌 하청공장을 경영했다. 오시황은 청량리포 소속으로서 택시기사였으며 나경일은 대구의 나이론 공장 노조, 김판홍은 청량리포 소속으로 철도노조에 관계했다.
"우리의 조직구성 원칙에서 중요한 점은 현장 노동자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통혁당과 통합을 결의한 한 가지 이유가 됩니다. 통혁당은 인텔리 중심이었으며 우리는 노동자 중심이었기 때문이죠."
통혁당과 '남조선해방전략당'이 통합하기로 했다는 증언은 최초로 소개되는 것이다. 그간 통혁당 관계서적에서 이같은 서술이 있었지만 전략당 사건 관계자에게 두 조직이 통합을 결의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통혁당과 합치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 사건 나기 1년 전쯤에 권재혁 씨와 통혁당 책임자 김종태 씨가 여러차례 만나 통합키로 합의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흡수하는 것이 아닌 당 대 당 통합이었어요. 권재혁과 김종태를 연갈한 사람이 정종소였어요."
정종소 씨는 어떤 분입니까?
"4·19직후에 대구의 《노동신문》편집국장을 했고 노동운동에 쭉 관여해왔습니다. 저나 이일재와는 전부터 친구사이였지요. 통혁당 조직원이면서 우리쪽 조직원이라고도 볼 수 있는 특이한 존재였습니다. 저와 이일재가 그를 권재혁 씨에게 소개했고 그가 다시 김종태와 권재혁을 만나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통혁당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와서 치매에 걸려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통혁당은 북과 직접 연계된 조직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략당'이 통혁당과 통합키로 결정했다면 이념과 노선면에서 완전히 합의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처음에 북과 연계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습니다. 이유는 북의 자금 유입 때문에 조직이 파괴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또 북과 연계할 경우 전향한 북의 공작원들이 북에서 남쪽의 아무개를 봤다든지 하는 말을 해서 조직이 깨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북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은 없었지만 자금문제는 조심하자는 태도였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통혁당과 통합키로 한 점으로 보면 노선의 노선의 변화가 생긴 건 아닌지….
"점차 조직이 확대되면서 자금 사정이 절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원이 다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정종소가 알선을 해서 김종태를 통해 자금을 받기로 한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쪽 자금이 들어왔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략당의 변혁노선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노선은 민족자주통일이었습니다. 권재혁 씨가 미국에 있을 당시 폴 스위찌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교류를 했고 또 미국의 대한반도정책 등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외세 탈피,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습니다. 또 생산노동의 가치에 대해 수 없이 역설했습니다."
'전략당' 관계자들이 대부분 구속되고 이같은 조직 흐름이 사건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병권 선생의 증언도 그동안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통혁당 사건의 여파였던 것. 통혁당 사건의 한 갈래였던 1968년 7월 118명이 붙잡힌 '임자도 사건'으로 김종태 씨도 연행되었는데 그 직전 부인에게 관계서류 등 한 보따리를 전했다. 부인은 친구에게 다시 맡겼는데 겁이 난 친구가 보따리를 통째로 중앙정보부에 넘겼던 것. 그 서류 보따리 속에는 김종태와 권재혁 두 사람간에 오간 얘기가 보고서로 담겨져 있었다. 그에 따라 권재혁을 비롯한 '전략당' 관계자들에게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게 된 것이었다.
김병권 선생도 이때 구속돼 1시멩서 7년, 2심에서 5년을 선고받고 1973년에 출소했다. 그 역시 이 사건으로 5년을 복역했지만 유일하게 사형이 확정돼 집행되고만 권재혁 선생에 대한 회환은 세월이 흐를수록 커가기만 했다.
"권재혁 씨가 사형까지 받게 된 까닭은 아무래도 일본 총련계와 접촉했다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우리 조직에 이형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누이가 총련 오사카지부의 간부로 있있었거든요. 당시 권재혁씨는 미국에 본사를 둔 참치회사의 한국사무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오갈 수 있는 복수여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일로 일본에 가는 길에 어려운 이형락의 형편도 얘기할 겸해서 그 누이를 만난 모양입니다. 누이에게 돈을 직접 지원받지는 않았는데 총련계과 접촉했다고 해서 사형이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니죠."
김병권 선생은 4년 전부터 권 선생의 기일인 11월 4일이면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인 독립공원 사형장 건물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잊혀진 애국자,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민족주의자 권재혁 선생에 대한 애끓는 추모와 신원(伸寃)의 뜻을 닮아서.
선생이 기억하는 권재혁 선생은 175cm의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 수려한 미남자였다고 한다. 엘리크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소탈하고 대중적인 사람관계가 돋보인 진실한 활동가였다는 것.
남민전과 이재문, 신향식
5년의 징역살이 끝에 출감한 김병권 선생은 이듬해인 1975년 5월 대구로 내려갔다. '전략당' 서클활동을 할 때 동지들이 자주 모이던 약전골목의 우종수 씨가 경영하던 월촌약국을 찾아갔다. 서도원(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씨가 침과 뜸을 놓으며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김 선생은 당시 대구지역에서 '전략당'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이재문(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과 서도원 정도라고 했다. 이재문은 이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여파로 발생한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이재문, 김병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새로운 저항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재문 씨가 추천하는 사람과 선생이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러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것.
"내가 신향식을 이재문에게 추천했습니다. 신향식과 이재문은 일면식이 없었던 사이였지요. 감옥에 있을 때 통혁당 사형수 이문규로부터 신향식을 추천받았습니다. '유능한 청년인데 손잡고 일할만한 사람'이라는 얘기였죠. 그 때까지는 신향식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세사람이 의견을 모아 남민전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향식은 통혁당계 인물이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972년까지 복역한 이력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새 조직 결성에 부정적이었던데 비해 신향식은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세사람은 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 태성장이라는 중국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 결성식을 거행했다. 전 해에 희생된 인혁당 관계자들의 속옷을 모아 남민전 깃발을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남민전이 지하조직이긴 했지만 우리 신분이 비합법이라는 점도 고려돼야 합니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됐는데 이른바 보안처분 대상자들은 신고를 하게 돼 있었어요. 이미 이재문은 수배상태에 있었고, 사회안전법상 신고 거부에 따라 저와 신향식도 비합법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병권 선생은 남민전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남민전 조직원으로서가 아닌 그저 단독범으로서였다. 검거 당시 남민전의 강령과 규약, 이재문으로부터 번역을 의뢰받은 《베트남전쟁의 실상》(마크 게인, 이와나미문고)을 지니고 있었지만 조직적인 관계를 완강히 부인한 끝에 단순 반공법 위반으로 3년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당시 혁신계 출신 김달호 변호사의 무료 변론도 한몫을 했다.
감옥살이가 끝나갈 무렵인 1979년 선생을 전향을 거부한 탓에 끝모를 징역살이가 기다리고 있는 청주감호소로 가야했다. 바로 그 때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선생은 감호소에서 바로 입건되고 말았다.
과거와 현재 이어주는 6·15 선전사업
남민전, 이재문, 신향식…. 모두 모르는 이름이랴며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결국 신향식과의 대질신문에 맞닥뜨리게 됐다.
"그 때 이재문은 할복해서 병원에 있었고, 대공분실에 있던 신향식과 대질신문에 걸렸어요. 그런데 오히려 신향식과 만남을 통해 어떻게 남민전 사건이 터졌는지 소상히 알게 됐습니다."
그 때 신향식 선생을 통해 들은 사건의 내막은 알려진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남민전 산하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연맹)에서 활동하던 학생운동가를 체포한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조직 내막도 모른 채 우연히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게 됐다는 것이다.
남민젖 사건은 1979년 10월 9일 중앙정보부의 첫 발표이래 세 차례에 걸쳐서 78명이 구속된 유신말 대표적인 시국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병권 선생은 남민전을 초기부터 조직해나간 경우지만 조직 확장시기에 단독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한 까닭에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그 후 감형을 거쳐 1988년 12월에 출소했다.
그러나 선생의 남민전 동지 이재문, 신향식 두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전략당' 동지 권재혁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김병권선생은 먼저 스러져간 동지들을 복권시키고 추모하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점에서 선생이 현재 벌이고 있는 6·16공동선언 실천을 호소하는 선전활동도 이해된다. 6·15공동선언을 실현해 통일을 이룰 때 죽어간 동료, 동지들의 상처가 치유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15 공동선언 실현을 호소하는 현수막 걸기, 광고판 설치, 사진보내기 운동 등은 내 마지막 비상금을 털어 넣어서 하는 사업입니다. 아버지의 산소가 도로에 편입돼 얻은 보상금도 다 내놓았습니다. 앞으로 독지가가 나오지 않으면 이 활동도 계속할 수가 없어요. 생애 마지막 사업일지도 모릅니다."
1960년대 이후 통일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사의 한 복판을 헤쳐온 김병권 선생. 그의 과거활동에 대한 회고는 그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과거를 통해 오늘의 통일 과제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6·15 남북 정상들의 사진을 보내고 광고판을 세우는 일도 어찌보면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6·15를 지지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신념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권재혁, 이재문, 신향식 복권은 6·15 실현에 달려있다.
김지형(민족21기자 · 현대사자료실 회원)
인민혁명당(인혁당), 통일혁명당(통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1960∼70년대 한국사회운동의 대표적 비합법·지하운동조직들이다. 이 흐름 속에서 활동해온 김병권(81)선생. 전략당과 남민전에 직접 참여한 그의 본격적인 1960∼70년대 사회운동 증언.
4·19시기 사회당, 민자통 활동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누구일까?
사단법인 민족화합운동연합(이하 민화련) 상임고문 김병권(81)선생이다. 현재 그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과 통일연대(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의 고문이기도 하다.
김병권 선생이 이처럼 합법적으로 통일운동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째다. 1990년 범민련활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이른바 '비합(법)운동'만 했다.
한국현대사에서 그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이하 전략당)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관련자로 알려져 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인민혁명당(인혁당)과 함께 1960∼79년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비합법 지하운동조직들의 중심에 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노구를 이끌고 사비를 들여가며 '6·15공동선언 실현' 선전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김병권 선생을 만나 비합법운동과 합법운동을 넘나들며 통일운동에 매진해온 삶을 들어보았다. 1960∼70년대 사회운동의 서막을 연 4·19항쟁 시기부터 얘기를 시작했다.
4·19시기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4·19직후엔 사회당 대구지부에서 활동했습니다. 민자통에서도 일했지요."
사회당은 4·19직후에 결성된 혁신정당이다. 1950년대 횡행했던 '북진통일론'대신 4·19직후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던 당시 사회운동세력의 총집결체 역할을 했던 정당이다.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은 사회당 등이 중심이 돼 당시 정당,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조직이다.
4·19이후 분출한 통일열기는 채 1년을 넘지 못하였다.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사회운동의 '암흑기'가 왔기 때문. 과거 통일운동가들에게 당연한(?) 결과로 여겨졌던 체포와 투옥. 선생의 감옥살이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대구역 아펭서 혁명검찰부에 체포돼 대구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당했다. 그때의 회고다.
"유치장에 들어가니 벽면에 일제때 독립운동가들이 써놓은 글귀가 그대로 있더군요. '일본놈들 물러가라' '조선은 조선 사람의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후 대구형무소에 수용됐는데 그때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경근(당시 민자통 대구경북위원장) 선생과 그 분의 조차인 안민생 선생도 들어와 계시더군요. 또 가슴 아팠던 일은 안민생 선생의 아들이 당시 경북대 학생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역시 그 곳에 잡혀와 있었던 일입니다. 3대가 한 감옥에 갇혔단 말입니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가 그해 12월 8일 석방됐다.
석방된 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대구로 내려와 동지들과 혼탁한 정국의 앞날을 논의하며 지냈습니다. 이일재, 이권, 조만호, 이승춘, 권오봉, 이갑득 씨등이 그때 모여서 시국을 의논하던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가 권재혁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권재혁. 그는 김병권 선생이 연루된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핵심인물이다. 1968년 8월 발표된 '전략당 사건'으로 유일하게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김병구너 선생의 생각은 각별하다.
"당시 남쪽 사회운동진영 가운데 그만큼 열정적이고 탁월한 활동가는 없었다고 봅니다."
권재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병구너 선생을 통해 권재혁에 대해 비로소 상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권재혁 선생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5·1이후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규제가 풀린 뒤였으니까 1963년 9월쯤입니다. 4·19시기 혁신정당 중 하나였던 통일사회당계 고정훈, 윤길중 등이 그 때 '민주사회주의동지회(민사동지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청계천인가 을지로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그 곳에서 시국문제와 관련해 세미나를 열곤 했어요. 그래서 이일재하고 같이 갔는데 마침 권재혁 씨가 〈미국 경제현황 및 후진국 개발문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미국측의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얘기였는데 설득력 있는 논지를 폈으며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습니다."
김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권재혁 선생은 1925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타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그후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4·19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길에 올랐다는 것.
그는 오자마자 곧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취직했다.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이한림 장군과의 친분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5·16이 난 후 이한림은 박정희와 사이가 벌어졌다. 5·16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
육사에서 나온 이한림은 수산개발공사로 옮겼고 권재혁도 그 곳의 영업 책임자로 따라갔다. 이 곳에 적을 두면서 권재혁 선생은 김병권, 이일재 등과 차츰 '동지적 관계'를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탁월한 활동가 권재혁
1968년 중앙정보부(중정)에 의해 발표된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권재혁 선생을 중심으로 한 이 조직체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당시 우리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냐하면 사건 당시 중정에 압수된 물품 중에 권재혁 씨가 세미나 때 발표한 논문이 있었어요. 그 논문 제목이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입니다. 그 제목을 따서 우리 조직 명칭이라고 갖다 붙인 것이죠."
그렇다면 아직 지하정당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는 말씀인데 당시 조직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고 보십니까?
"당시는 서클활동 수준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향후 서클들의 연합조직을 만들어서 차츰 당조직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있었지만 당시는 그렇게 까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더라도 내부에서 스스로 부르는 이름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권재혁 씨가 동학의 포(包)조직원리를 우리 조직에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서클들을 '포'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지역의 경우 서울포, 대구지역의 경우 대구포등으로 불렀죠."
당시 어떤 포들이 있었습니까?
"중앙포, 대구포, 부산포, 청량리포, 성동포, 학생포 등등이죠. 중앙포는 권재혁 씨가 책임자이고 이일재(조직책임), 이강복(이일재의 삼촌, 와세다대 출신, 국제정세 분석담당)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포에는 반드시 현장 노동자가 1명 이상이 포함되는 것이 조직 구성의 원칙이었습니다. 또 포원이 6명이 되면 분열해서 또 다른 포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당시 성동구포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 조직체에서 김병권 선생은 조직생활을 하면서 자금조달의 일부를 담당했다고 밝혔다. 당시 대구에서 위생도기 사업을 하면서 활동 자금을 조달했다는 것. 그러나 자신이 조달한 비용은 전체의 20% 정도일뿐 나머지는 권재혁 씨가 조달했다고 한다.
1968년 당시 중정에 의해 조직에 소속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체포됐다는 게 김선생의 증언이다. 그러면서 서류함 깊은 곳에서 낡은 문서를 꺼내 놓는다. 1969년 3월자로 된 서울지방검찰청의 항소이유서 원본이다. 여기에 나오는 피고인 명단을 살펴보자.
이강복, 이형락, 노정훈, 김봉규, 박점출, 조현창, 김병권, 오시황, 나경일, 김판홍. 권재혁과 이일재의 이름이 안 보이는 이유는 두 명의 경우 1심에서 최고형인 사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검찰이 항소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통혁당과 통합결정
이형락은 대구포 소속으로서 남로당출신이다. 노정훈은 학생 책임자였으며 4·19시기 통일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김봉규는 청량리포 책임자였고 박점출은 연합노조에 관여했다. 조현창은 부산포 소속으로서 당시 금성재벌 하청공장을 경영했다. 오시황은 청량리포 소속으로서 택시기사였으며 나경일은 대구의 나이론 공장 노조, 김판홍은 청량리포 소속으로 철도노조에 관계했다.
"우리의 조직구성 원칙에서 중요한 점은 현장 노동자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통혁당과 통합을 결의한 한 가지 이유가 됩니다. 통혁당은 인텔리 중심이었으며 우리는 노동자 중심이었기 때문이죠."
통혁당과 '남조선해방전략당'이 통합하기로 했다는 증언은 최초로 소개되는 것이다. 그간 통혁당 관계서적에서 이같은 서술이 있었지만 전략당 사건 관계자에게 두 조직이 통합을 결의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통혁당과 합치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 사건 나기 1년 전쯤에 권재혁 씨와 통혁당 책임자 김종태 씨가 여러차례 만나 통합키로 합의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흡수하는 것이 아닌 당 대 당 통합이었어요. 권재혁과 김종태를 연갈한 사람이 정종소였어요."
정종소 씨는 어떤 분입니까?
"4·19직후에 대구의 《노동신문》편집국장을 했고 노동운동에 쭉 관여해왔습니다. 저나 이일재와는 전부터 친구사이였지요. 통혁당 조직원이면서 우리쪽 조직원이라고도 볼 수 있는 특이한 존재였습니다. 저와 이일재가 그를 권재혁 씨에게 소개했고 그가 다시 김종태와 권재혁을 만나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통혁당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와서 치매에 걸려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통혁당은 북과 직접 연계된 조직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략당'이 통혁당과 통합키로 결정했다면 이념과 노선면에서 완전히 합의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처음에 북과 연계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습니다. 이유는 북의 자금 유입 때문에 조직이 파괴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또 북과 연계할 경우 전향한 북의 공작원들이 북에서 남쪽의 아무개를 봤다든지 하는 말을 해서 조직이 깨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북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은 없었지만 자금문제는 조심하자는 태도였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통혁당과 통합키로 한 점으로 보면 노선의 노선의 변화가 생긴 건 아닌지….
"점차 조직이 확대되면서 자금 사정이 절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원이 다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정종소가 알선을 해서 김종태를 통해 자금을 받기로 한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쪽 자금이 들어왔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략당의 변혁노선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노선은 민족자주통일이었습니다. 권재혁 씨가 미국에 있을 당시 폴 스위찌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교류를 했고 또 미국의 대한반도정책 등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외세 탈피,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습니다. 또 생산노동의 가치에 대해 수 없이 역설했습니다."
'전략당' 관계자들이 대부분 구속되고 이같은 조직 흐름이 사건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병권 선생의 증언도 그동안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통혁당 사건의 여파였던 것. 통혁당 사건의 한 갈래였던 1968년 7월 118명이 붙잡힌 '임자도 사건'으로 김종태 씨도 연행되었는데 그 직전 부인에게 관계서류 등 한 보따리를 전했다. 부인은 친구에게 다시 맡겼는데 겁이 난 친구가 보따리를 통째로 중앙정보부에 넘겼던 것. 그 서류 보따리 속에는 김종태와 권재혁 두 사람간에 오간 얘기가 보고서로 담겨져 있었다. 그에 따라 권재혁을 비롯한 '전략당' 관계자들에게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게 된 것이었다.
김병권 선생도 이때 구속돼 1시멩서 7년, 2심에서 5년을 선고받고 1973년에 출소했다. 그 역시 이 사건으로 5년을 복역했지만 유일하게 사형이 확정돼 집행되고만 권재혁 선생에 대한 회환은 세월이 흐를수록 커가기만 했다.
"권재혁 씨가 사형까지 받게 된 까닭은 아무래도 일본 총련계와 접촉했다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우리 조직에 이형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누이가 총련 오사카지부의 간부로 있있었거든요. 당시 권재혁씨는 미국에 본사를 둔 참치회사의 한국사무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오갈 수 있는 복수여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일로 일본에 가는 길에 어려운 이형락의 형편도 얘기할 겸해서 그 누이를 만난 모양입니다. 누이에게 돈을 직접 지원받지는 않았는데 총련계과 접촉했다고 해서 사형이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니죠."
김병권 선생은 4년 전부터 권 선생의 기일인 11월 4일이면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인 독립공원 사형장 건물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잊혀진 애국자,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민족주의자 권재혁 선생에 대한 애끓는 추모와 신원(伸寃)의 뜻을 닮아서.
선생이 기억하는 권재혁 선생은 175cm의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 수려한 미남자였다고 한다. 엘리크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소탈하고 대중적인 사람관계가 돋보인 진실한 활동가였다는 것.
남민전과 이재문, 신향식
5년의 징역살이 끝에 출감한 김병권 선생은 이듬해인 1975년 5월 대구로 내려갔다. '전략당' 서클활동을 할 때 동지들이 자주 모이던 약전골목의 우종수 씨가 경영하던 월촌약국을 찾아갔다. 서도원(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씨가 침과 뜸을 놓으며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김 선생은 당시 대구지역에서 '전략당'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이재문(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과 서도원 정도라고 했다. 이재문은 이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여파로 발생한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이재문, 김병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새로운 저항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재문 씨가 추천하는 사람과 선생이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러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것.
"내가 신향식을 이재문에게 추천했습니다. 신향식과 이재문은 일면식이 없었던 사이였지요. 감옥에 있을 때 통혁당 사형수 이문규로부터 신향식을 추천받았습니다. '유능한 청년인데 손잡고 일할만한 사람'이라는 얘기였죠. 그 때까지는 신향식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세사람이 의견을 모아 남민전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향식은 통혁당계 인물이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972년까지 복역한 이력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새 조직 결성에 부정적이었던데 비해 신향식은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세사람은 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 태성장이라는 중국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 결성식을 거행했다. 전 해에 희생된 인혁당 관계자들의 속옷을 모아 남민전 깃발을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남민전이 지하조직이긴 했지만 우리 신분이 비합법이라는 점도 고려돼야 합니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됐는데 이른바 보안처분 대상자들은 신고를 하게 돼 있었어요. 이미 이재문은 수배상태에 있었고, 사회안전법상 신고 거부에 따라 저와 신향식도 비합법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병권 선생은 남민전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남민전 조직원으로서가 아닌 그저 단독범으로서였다. 검거 당시 남민전의 강령과 규약, 이재문으로부터 번역을 의뢰받은 《베트남전쟁의 실상》(마크 게인, 이와나미문고)을 지니고 있었지만 조직적인 관계를 완강히 부인한 끝에 단순 반공법 위반으로 3년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당시 혁신계 출신 김달호 변호사의 무료 변론도 한몫을 했다.
감옥살이가 끝나갈 무렵인 1979년 선생을 전향을 거부한 탓에 끝모를 징역살이가 기다리고 있는 청주감호소로 가야했다. 바로 그 때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선생은 감호소에서 바로 입건되고 말았다.
과거와 현재 이어주는 6·15 선전사업
남민전, 이재문, 신향식…. 모두 모르는 이름이랴며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결국 신향식과의 대질신문에 맞닥뜨리게 됐다.
"그 때 이재문은 할복해서 병원에 있었고, 대공분실에 있던 신향식과 대질신문에 걸렸어요. 그런데 오히려 신향식과 만남을 통해 어떻게 남민전 사건이 터졌는지 소상히 알게 됐습니다."
그 때 신향식 선생을 통해 들은 사건의 내막은 알려진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남민전 산하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연맹)에서 활동하던 학생운동가를 체포한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조직 내막도 모른 채 우연히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게 됐다는 것이다.
남민젖 사건은 1979년 10월 9일 중앙정보부의 첫 발표이래 세 차례에 걸쳐서 78명이 구속된 유신말 대표적인 시국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병권 선생은 남민전을 초기부터 조직해나간 경우지만 조직 확장시기에 단독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한 까닭에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그 후 감형을 거쳐 1988년 12월에 출소했다.
그러나 선생의 남민전 동지 이재문, 신향식 두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전략당' 동지 권재혁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김병권선생은 먼저 스러져간 동지들을 복권시키고 추모하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점에서 선생이 현재 벌이고 있는 6·16공동선언 실천을 호소하는 선전활동도 이해된다. 6·15공동선언을 실현해 통일을 이룰 때 죽어간 동료, 동지들의 상처가 치유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15 공동선언 실현을 호소하는 현수막 걸기, 광고판 설치, 사진보내기 운동 등은 내 마지막 비상금을 털어 넣어서 하는 사업입니다. 아버지의 산소가 도로에 편입돼 얻은 보상금도 다 내놓았습니다. 앞으로 독지가가 나오지 않으면 이 활동도 계속할 수가 없어요. 생애 마지막 사업일지도 모릅니다."
1960년대 이후 통일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사의 한 복판을 헤쳐온 김병권 선생. 그의 과거활동에 대한 회고는 그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과거를 통해 오늘의 통일 과제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6·15 남북 정상들의 사진을 보내고 광고판을 세우는 일도 어찌보면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6·15를 지지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신념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출처 : 한국노동사
글쓴이 : 김영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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