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노무현은 1987년 6월 그곳에 있었다.
vicsteel
2007. 6. 4. 23:06
내가 초등학생이던 그 해 6월에도 여전히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6월은 그랬다.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나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뛰어놀기에도 바빴다. 하지만 유쾌하고 조용하던 나의 세상과는 달리 세상은 힘겹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따가운 눈과 코를 비비며 수업을 들어야 했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하얀 헬맷과 청바지를 입은 젊은 아저씨들을 매일 만나야 했다. 하지만 뉴스도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우리가 눈이 따가운 것은 최류탄 때문이며 헬맷과 청바지의 젊은이들은 백골 특경단 이라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한 번은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난 87학번 누이는 그 무렵 집을 떠나 서울 친척 집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누이가 왜 아버지에게 혼이 났는지도, 왜 집을 떠났는지도 몰랐다. 누이는 친척집에 가서 군에 입대한 친척 형의 방을 쓰게 되었다. 합기도 3단이던, 나와 잘 놀아주던 그 친척 집 형은 군대에 입대한 후 백골단 대원으로 차출 되었다.
대학생이던 나의 누이와 백골단 대원이던 나의 친척 형이 시위 현장에서 마주친 일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전해 들었다. 무지로 남을 것을 강요받던 격동의 역사를, 나는 몇 년이 지나 중학생이 되어서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 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군사 정권을 굴복시킨 그 뜨거운 87년 6월의 현장을 딱 10년이 지나서야 텔레비젼 화면으로 접할 수 있었다. 97년 대한민국은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났다. 그렇게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20년이 흘렀고, 나는 어느 덧 30대가 되었다. 강산은 두 번이 변했다. 기술도 변했고, 환경도 변했고, 세상도 사람도 참 많이 바뀌었다. 세상은 좋아지기도 하였고, 세상은 또 나빠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20년 전 6월에 사람들이 꿈꾸던 것에 비하면 세상은 여전히 멈춰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민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룬 지 20년, 하지만 민주화의 과실은 땅에 떨어져 썪어가고 있으며, 이제는 당시 손을 놓고 있던 또 비겁하게 침묵하던 자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사람들은 지난 10년 간 민주화 세력이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민주화 세력은 무능하였으며 사회를 분열시켰다고 한다.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평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민주화 세력이 실패하였다고 해서 민주화 자체가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민주화 세력이 어느 정도 무능했다고 해서 민주화 세력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까지 부정하자고 말 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데모크라시(Democracy, 민주 또는 민치)라는 단어가 민주주의(民主主義)로 번역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양 사회는 민주를 하나의 사상 쯤으로 여기는 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동양 사회는 민주를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사회의 선택적인 양식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민주는 주의(主義)가 아니다. 어떠한 대안이 생겨나면 용도 폐기되는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또 최후 의사 결정자라는 '민주'는 이념이 아니며 진리이자 절대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의 역사와 흐름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다. 그런데 2007년 지금 우리 사회에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또 더 많은 경제 성장 등을 위해서 '민주' 따위는 용도 폐기 하여도 상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서글프다. 물론 이러한 서글픔의 기저에는 '보수화'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보수화가 중심 내용은 아닐 것이다. 사회는 정치적으로 항상 반동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진보화'가 심화되면 사회는 '보수화'의 반동을 겪게 되고, '보수화'가 심화되면 사회는 '진보화'의 반동을 겪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진동추라면 중력 축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진동하는 것이 정상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97년까지 40년간 엄청나게 많은 '보수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간 이룬 '진보화'는 그러한 보수화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진보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되었고, 사회 변화에 대한 믿음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단순한 '보수화 반동'이라면 그래도 나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 자체가 보수화로부터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는 모양새라서 참으로 우려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20년간 쌓아 온 민주화의 가치조차 부정하고 되돌리려는 것 같아 슬프다. 민주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조차 빵 조각을 위해 내동댕이 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회는 정신적으로 정체되거나 퇴보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것 조차 사치로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돼지처럼 살아갈 준비를 한다. 나는 새삼스럽게 일본의 이야기를 또 꺼내야 할 것 같다. 한국인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또 열심히 그렇게 되길 바라기도 하듯, 몇 년을 앞에 두고 한국은 항상 일본을 따라간다는 해석론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인 듯 하다. 그리고 경제, 문화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치 영역에서 조차도 그러한 일본 뒤따르기가 대세가 되어가는 듯 하여 씁쓸하기만 하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일본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시각이었다. 무엇보다 일본은 왕을 모시는 내각제 국가이기 때문에 대통령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과 정치적으로 큰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일본과 달리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세력이 끊임없이 뿌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일본과는 다르다는 해석론이 여전히 일반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2007년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우경화로 치닫은 일본 사회를 답습할 차비를 하고 있다. 일본도 15년 전 쯤 역사 상 최초로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집권해 온 자민당의 부패와 우경화에 대한 반동이었다. 하지만 일본 국민은 진보 정당을 보좌하고 진보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민당은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파벌주의와 정격유착을 등에 업고 계속해서 득세하였다. 일본 진보 세력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몰락했고, 그 이후의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듯이 고이즈미의 등장이었다. 고이즈미는 개혁주의를 표방하였지만, 극 보수주의자이며 극우 민족주의자였다. 고이즈미의 후계자 아베 총리는 한 술 더 떠, 보통국가 헌법을 제정하여 일본을 군국주의와 경제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일본은 자기들 스스로도 '이상한 나라'라고 여기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일본 국민들은 더 이상 변화에 대한 꿈을 꾸지 않는다. 사회가 우경화로 치닫고 빈부 격차는 심해지고 있으며, 사회 안전망은 붕괴되어 가지만 자민당의 독주와 전횡을 견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진보 세력과 좌파는 완전히 몰락하여 그 명맥조차 없다고 한다. 국민들은 일본의 우경화와 신자유주의를 두려워 하지만 이러한 흐름을 견제할 세력 조차 찾지 못해 손을 놓고 흘러가는 대로 바라만 보고 있다. 국민들은 끝없이 어리석어 지고 있으며 끝없이 무력해지고 순종적이고 운명적인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가 될까봐 나는 참으로 두렵고 걱정스럽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러한 징조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암울하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 세력의 집권은 5년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정부를 '좌파'로 치부하고 '민주화 세력'으로 바라보지만 정치적인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해석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 잘 알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도 강한 시장주의와 통화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역대 독재자들에게 '좌파'로 찍혔을 뿐이지 실제로 '좌파'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민주당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광주'를 팔아 자신들이 민주주의, 진보 세력인 것 처럼 행세하였지만, 햇볕정책을 제외하고 민주당이 지지한 진보주의 정책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민주당도 우파 정당이고 지역주의 정당일 뿐이다. 그런 정당이 주축이 되어 이제와서 '진보 대연합'을 만들겠다고 만들겠다고 하니, 진보주의 세력은 기가 차고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많은 면에서 한계를 보였고 또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 간 노무현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것들, 바꿀 수 없었던 것들을 우리는 이루었고 바꾸었다. 노무현은 진보의 선두에서 목소리를 높일 자격이 있는가? 그렇다. 대다수의 정치인과 지도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노무현은 당당히 앞에 나서 싸웠다. 국민들이 정직한 양심과 용기를 필요로 할 때, 그는 그러한 양심과 용기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치인,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었으며, 또 지금 비겁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을 향해 핏대를 세울 자격이 있다. 이제 대통령이 옆집 개 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지만, 그 만큼 우리는 열린 사회, 투명한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노무현이 실패했다고 평가받는다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워낙 거세었고, 또 우리 국민들 스스로가 진보와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득권 세력의 흔들기와 국민들의 확신 없는 정치 인식이 진보의 실패를 낳았다는 말이다. 진보주의 정책들은 항상 국민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진보는 현재의 이득보다는 미래의 이득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화의 결과는 항상 뒤늦게 나타난다. 부정과 부패가 해소되었다는 것은 피부에 잘 와닿지 않는다. 국민들은 그저 내 지갑이 두둑하고 지출이 적으면 행복해 한다. 자신들이 누군가를 거리낌 없이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내가 입는 작은 손해에는 입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 국민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너무나 짧다. 천박한 민주주의 국가 일본보다도 더 짧은 역사이다. 그래서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적 인식이 경박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반대로 참으로 무겁고 중차대하다. 대통령과 정치인에게 말로 정치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들인가? 그럼 정치와 국정 운영을 말로 하지 않고 무엇으로 하는가? 폭력과 억압과 기만과 야합으로 정치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비겁하게 뒷짐지고 침묵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부모의 계층을 자식이, 그리고 손자가 대대손손 물려받고 순응하며 변화조차 꿈꾸지 않는 신분사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그냥 현실에 순응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1987년 6월 우리의 한 세대들은 미래와 역사 앞에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안위를 내어 놓았다. 우리는 그냥 손만 놓고 있었던 세대로 기억될 것인가? 당신은 무너진 민주와 썩은 정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1987년 6월이 2007년 6월에 묻고 있다. |
출처 : 노무현은 1987년 6월 그곳에 있었다.
글쓴이 : 누구세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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