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의 시간
완전한 선 혹은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세계의 불합리에 기인하며, ‘완전’에 부합될 만큼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상태의 균질을 인간성에서 추출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인간의 선과 악은 모든 예술 장르의 소재로 승화되기에 적합한 모티브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천인공노할 악당과 카리스마를 지닌 매력적인 악한이 주변 인물이나 주인공으로 설정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완전한 선과 악으로 대별되는 천상계의 천사와 악마가 아니기에 이들은 때론 이해와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악한 인간이 선한 인간으로 변해 가는 권선징악 계열의 내러티브는 진부함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이 세상의 모순 속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악한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란 여전히 잔인하다.
그런 점에서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은 순수했던 한 인간의 영혼과 인생을 간단없이 잔인함으로 얼룩 지워 놓은 못된 영화다. 영화 음악과 월드 뮤직의 계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고란 브레고비치가 음악을 담당한 이 영화의 감정적 수위는 음악이라는 간극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
유고의 한 집시 마을, 사생아로 태어난 페르카니는 무당인 할머니와 도박에 찌들어 사는 망나니 삼촌 메르젠, 다리가 불편한 여동생 다니라와 함께 살고 있다. 페르카니는 가진 것은 없지만, 할머니에게 염력을 물려받은 낙천적이고 착한 청년이다. 석회를 가지러 온 마을 처녀 아즈라와 사랑에 빠진 그는 가난하고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아즈라의 어머니에게 박대 당한다. 한편 도박으로 빚을 지게 된 메르젠 삼촌은 돈을 내놓으라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그 도박 빚의 채권자는 이 마을 최고의 출세자인 아메드였다.
어느 날 아메드의 아들이 갑작스레 병에 걸리자, 페르카니의 할머니는 주술로 그를 회생시킨다. 이를 보답하려는 아메드에게 할머니는 다니라를 도시로 데려가 다리를 치료해줄 것을 요구하고 페르카니도 이 여정에 동참한다. 다니라를 입원시킨 후 아메드는 페르카니를 밀라노로 데려가는데, 알고 보니 앵벌이 집단의 두목이었던 아메드는 페르카니에게 인신 매매 행위를 강요한다. 페르카니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차츰 돈과 권력의 맛을 알게 되고 아메드에게 충성을 다하며 금의환향을 꿈꾼다.
그러던 중 집시 아이들을 몇 명 더 데려오라는 아메드의 지시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간 페르카니는 연인 아즈라의 배가 남산만해져 있는 것을 본다. 자신의 아이라는 아즈라의 말을 의심하면서도 페르카니는 아즈라와 결혼식을 올린 후 그녀와 함께 밀라노로 돌아온다. 아즈라는 결국 사내아이를 낳다가 죽고, 페르카니는 아이를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고향에 페르카니를 위한 집을 짓고 있다고 속인 아메드는 거짓말이 들통나자 전 재산을 챙긴 뒤 줄행랑친다.
다니라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줄로만 알았던 페르카니는 다니라가 수술은커녕 아메드 일당의 밑에서 앵벌이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아메드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로마에서 우연히 다니라를 상봉한 페르카니는 다니라가 보살피고 있었던 자신의 아들을 만나게 되고, 그 아이가 자신의 혈육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아메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페르카니는 아메드의 결혼식장에서 염력으로 포크를 날려 그를 죽인다. 도망가던 페르카니 또한 아메드의 약혼녀가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유럽에서 집시 아이들이 유괴되어 거래되고 있다는 충격적 보도를 접하고 영감을 얻은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 집시 마을에 찾아가 그들의 언어와 풍습을 채집하고, 그들을 직접 출연시켜 만든 영화가 「집시의 시간」이다. 유고 사라예보 출신인 쿠스트리차 감독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어법을 확립하여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각종 영화제를 휩쓸어 구설수와 찬사의 반응을 넘나들기도 했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이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 주고 있는데, 영화 곳곳에 배치된 몽환적 이미지들은 작위적으로 느껴진다기보다 집시라는 신비로운 집단에 관한 영화로서의 자연스러운 상승 효과를 수반한다. 염력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페르카니나 주술로 사람들을 치료하는 할머니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 조지 축제일, 강에서는 집시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관 속에 누워 황금빛으로 빛나는 강 위를 배회하는 아즈라와 페르카니의 애정 행위는 신비롭게 그려진다. 영화에서는 면사포가 날아다니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하는데, 페르카니 남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을 만날 때와 아즈라가 죽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에서다. 새로운 삶과 행복을 기약해야 할 면사포는 비정한 죽음의 기운을 드리운 채 페르카니의 시야를 떠돈다. 할머니가 이웃 아이의 병을 고쳐 준 대가로 받은 칠면조는 페르카니의 말을 알아듣고, 꿈은 회화적인 이미지로 충만하다. 결혼식도 성 조지 축제도, 공감하기 어려운 낯선 풍경과 환영들로 밑그림을 이루고, 꾀죄죄하고 무뚝뚝한 집시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함께 근거를 상실한 낙천이 깃들어 있다. 산골을 벗어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페르카니의 삶은 모천 회귀성 어류인 연어의 숙명과도 짐짓 닮아 있어, 인위적인 것과는 상극을 이루는 집시의 자연적인 생태를 상기시킨다.
마술사·점성술사·악사 등으로 유랑하는 떠돌이 집시의 삶에서 음악은 물과 같은 존재다. 즉흥성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음악은 현란한 음조와 서글픈 한으로 음표가 매겨지고, 노래는 처연해서 차마 들어주기가 애닯다. 달빛을 지붕으로 삼고, 지열을 이불 삼아 흐르는 삶인지라 그들이 내뿜는 음악적 감성 또한 각별하다. 인공의 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피의 분출이며, 핍박과 박해의 역사를 대변하는 한의 응집이며, 그럼에도 새로운 생명력과 희망을 길어 올리는 투명한 두레박이다.
현대판 오르페우스 같은 모습을 한 페르카니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아코디언을 든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아코디언으로 연주되는 음악은 동구권을 대표하는 영화 음악가 고란 브레고비치의 <Talijanska>으로, 또 하나의 테마곡인 집시들의 합창 <Ederlezi>와 대비를 이룬다.
<Talijanska>이 다소 유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 속에서 페르카니의 직접적인 연주를 통해 돌출되는 테마라면, <Ederlezi>는 흡사 사진 작가인 마가렛 카메론의 몽환적인 피사체들처럼 등장 인물이 주변과 어우러진 하나의 그림이 되는 순간 잔잔하게 깔리는 음영이다. 성 조지 축제일에도, 면사포가 휘날리는 장면에서도 이 음악이 나온다. 여자 집시의 애절한 고음으로 시작되어 이중창으로, 합창으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집시 음악 컴필레이션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는데, 집시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어필되는 시끄럽고 청승맞다는 느낌보다는 동유럽의 엘레지를 듣는 듯 되새길수록 정감 어린 곡이다.
페르카니가 남의 집 창문을 뛰어넘어 돈을 훔치다가 피아노를 발견하고 <Talijanska>를 연주하는 부분도 흥미로운데, 부랑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고단한 생활을 직접적으로 투사하고 있는 피아노 선율은 아코디언으로 연주할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을 안겨 준다. <Talijanska>를 가만히 듣다 보면 뽕짝 리듬 같기도 하고 탱고 음악 혹은 슬라브의 민속 선율 같기도 한데, 가히 멀티에스닉의 면모를 풍기는 곡이라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불행한 인생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이 영화는 페르카니라는 개인의 상처만을 이야기하고 있진 않다. 만약 전자를 의도했다면 대본도 못 읽는 실제 집시들을 우여곡절 끝에 영화에 투입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순수한 집시 청년의 타락과 굴절된 삶은 유럽 각지를 떠도는 모든 소외된 집시들의 자화상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따뜻한 침상과 보드라운 베개에 몸을 뉘인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종족들이 아니다. 시험도, 취업 걱정도 없이 자연을 벗삼으며 세월을 낚는 꿈꾸는 보헤미안은 더더욱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사기와 도둑질을 밥먹듯 해야 하고, 경찰에 연행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고단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외 계층이다.
집시 아이들을 유괴하여 팔아 치우고 앵벌이로 만드는 아메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가족들과 연인에 대한 소박한 사랑과 초능력을 지닌 순수한 청년 페르카니 또한 세상이 마련해 놓은 악조건과 함정 속에서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추악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불행과 악의 카테고리가 이 두 사람의 죽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고향 마을에 안치된 페르카니의 시신에 얹혀져 있던 금화를 페르카니의 어린 아들이 어른들 몰래 가져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의미를 부여하자면 아주 불길한 징조의 끝맺음이 아닐 수 없다.
감독은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릴 테이프처럼 되감김질되는 이 버림받은 자들의 비극적 현실 속에 초현실적인 삽화를 간헐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다큐멘터리와는 구별지어 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만큼 이 영화는 사실성에 입각하여 만들어졌고, 화면에서는 감독의 무의식적 분노가 퉁겨져 나올 것 같다. 칸느는 이 영화에 감독상을 안겨 줬지만,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집시들은 오늘도 화면 속의 인생을 살아간다. Beatr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