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들길에서 마을로
들길에서 마을로
-고재종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 그림자 내려오고 길섶의 망초 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방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 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룬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 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 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 자란다. 이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는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향기. 그 싱그러움에 이르러선 문득 들이 넓어진다. 그 넓어짐으로 난 아득히 안 보이는 지평선을 듣는다. 뿌듯하다. 이 뿌듯함은 또 어쩌려고 웬 쑥국새 울음까지 불러내니 아직도 참 모르겠다. 앞 강물조차 시리게 우는 서러움이다. 하지만 이제 하루 여미며 저 노인과 나누고 싶은 탁배기 한 잔. 그거야말로 금방 뜬 개밥바라기별보다도 고즈넉하겠다. 길은 어디서나 열리고 사람은 또 스스로 길이다. 서늘하고 뜨겁고 교교하다. 난 아직도 들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게 좋으나, 그 어떤 길엔들 노래 없으랴. 그 노래가 세상을 푸르게 밝히리.
사람의 등불
저 뒤란 댓이파리에 부서지는 달빛
그 맑은 반짝임을 내 홀로 어이 보리
섬돌 밑에 자지러지는 귀뚜라미랑 풀여치
그 구술 묻은 울음소리를 내 홀로 어이 들으리
누군가 금방 달려들 것 같은 저 사립 옆
젖어드는 이슬에 몸 무거워 오동잎도 툭툭 지는데
어허, 어찌 이리 서늘하고 푸르른 밤
주막집 달려가 막소주 한 잔 나눌 이 없어
마당가 홀로 서서 그리움에 애리다 보니
울 너머 저기 독집의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이
어찌 저리 따뜻한 지상의 노래인지 꿈인지
밤꽃 피는 세상 그려
모내기 끝낸 유월 하지
텃밭가 푸르르매 타는 밤꽃이
휘영청 달빛 싣고 밤을 환히 밝힐 때
토방 아래 평상 위
고단한 육신을 누이신 어머님의 머리맡으로
보리 께끼며 마른 쑥잎 모아 모깃불을 놓는다.
이따금 바람 스쳐와 지친 눈 서늘히 깨우고
오늘 따라 하늘가에 별빛 또한 맑지만
줄곧 끙끙대며 아픈 삭신을 뒤척이시는
어머님의 신음 소리는 금세
천지사방의 엉머구리 떼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일평생 못난 자식들 생각 빼놓고
그 무엇을 위한 욕심도 접고
다만 살아 있는 날들의 일상으로 기쁨보다
어려움으로 얼룩진 땅에서 씨 뿌리고 살아오신
당신 생애는 올해도
왜 나의 타는 그리움 되어 푸른 하늘에 걸릴까.
골담초 우거진 샘가에
뜨건 목을 적시고 등물 끼얹고 돌아와
어머님의 야윈 다리를 주물러 드려 보지만
모깃불 꾸역거려도 모기는 더욱 극성 대듯
어머님의 신음소리는 밤으로 더욱 깊어가고
나는 다만 흐려진 눈 들어
아픔 너머 환히 타는 밤꽃 자꾸 치어다본다.
추석
창호지에 어리는
달빛에 몸 뒤척이다가
못내 설레는 가슴 마루 끝에 나서서
활짝 열린 사립을 넘어보다가
사무치는 그리움
더욱 못 이겨
훤한 마당 질러 동구에 나섰다가
동구 옆 새하얀 메밀 밭가를
옷고름에 눈물 적시며 온통 서성이다가
이윽고는 타는 가슴 불나서 불나서
먼 신작로까지 나갔다가
막차도 끊긴 신작로를
열 발 높은 수숫대로 종내 목 늘이다가
끝내는 오열 솟구쳐
길 섶 씨르래기 울음으로 스러지는 마음
차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그만 푸른 눈빛으로 우러르는 거기
부처님 같은 어머님의 만월.
조약돌 한 개
해종일 그대
강변 뙈기밭 일구어
오목조목 참깨 씨며 미영 씨를 놓고
잔물결 이는 저녁강물에
뜨건 발을 담그고 앉아
거기 그처럼 오래오래 먼 산을 바라보는구려.
그대 가난한 삶의
슬픔의 총량만큼
흐르는 물살 위로 노을은 가득 반짝이고
이따금 저녁바람은 불어
가만가만 풀꽃들은 흔들리는데
그대 거친 두 뺨에 흐르는
해맑은 눈물 줄기는 어찌 그리 애틋한 지,
예의 강물은 소리 죽여 흐르고
몇 마리 저녁 새는
그대 바라보는 먼 산으로 날고
그대 혼곤히 젖은 마음 또한
무슨 아픈 그리움으로 가득할 해거름
서러움으로 더욱 깊어지는
그대 삶의 아름다운 강물 위로
빛나는 조약돌 한 개 던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