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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칼럼]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초인` 크로캅

vicsteel 2009. 10. 2. 17:17
::MFIGHT::
[칼럼]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초인' 크로캅
엠파이트 D.B

"눈을 뜰 수가 없다"

믿을 수 없었다. '불꽃하이킥' 미르코 크로캅이 경기 중단을 요구하며 레프리에게 뱉은 말이 저런 말이었다니…. 크로캅의 망가진 얼굴도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장님캅', '기권캅' 등의 조롱성 댓글이 격투기 커뮤니티에 잘 익은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걸리는 모습이 눈을 감고도 보이는 지경이었다. ('OO캅'이란 댓글놀이는 이제 크로캅 안티 팬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스포츠가 된 듯하다.)

"전설의 씁쓸한 퇴장"이라는 해설자의 말을 끝으로 TV를 껐다.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눈을 감는다. "눈을 뜰 수 없다"는 오늘의 크로캅이, '눈 뜨고 보기 힘든'이 피투성이의 크로캅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전설을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감은 눈을 뜨고 싶지 않다. 어디선가 듀란 듀란(Duran Duran)의 와일드 보이(Wild boy)가 들려오는 듯하다. 전설의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전장의 상처를 안고

잘 알려졌다시피, 크로캅은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에 자리한 크로아티아란 나라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십대 때 내전을 겪고 친구를 잃는 아픔을 경험을 한다. 이때의 상처와 공포는 심장에 새겨진 문신처럼 크로캅의 내면에 뼈아프게 각인되어, 그를 이끄는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하릴없이 탓하고 있기 보단 스스로 강해지는 길을 택했고, 태권도를 통해 처음으로 무도에 입문하고 미친 듯이 몰두한다. 크로캅에게 약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강함만이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보증수표였기에, 그렇게 세상은 외부도 내부도 온통 전쟁 중이었기에.

전장에서 마음 속 공포와 싸우며 청소년기를 보낸 크로캅은 성인이 되어 결국 사각의 링 혹은 팔각의 철망에 갇혀 다시 한 번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는 운명을 제 손으로 선택한다.

'낭인'의 끝없는 도전

크로캅이 처음으로 입성한 메이저 무대는 일본의 입식격투단체 K-1. 그는 그곳에서 빠른 스텝과 위빙, 송공처럼 찔러 넣는 스트레이트와 전매특허가 된 '불꽃' 하이킥으로 K-1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에 오르며 절정의 기량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그러던 그가 돌연 프라이드행을 선택, 세간을 놀라게 하더니 어느덧 프라이드 헤비급 챔피언 표도르의 목을 노리는 파이터로 승승장구한다.

물론 크로캅은 연승행진 중간 중간에 약체로 파악되던 파이터에게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며 많은 격투팬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고, 또 그럴 때마다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서며 또 한 번 격투팬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그의 경기는 매번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승률이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파이터의 경기보다 불안했다. 톱클래스의 파이터였으나 그는 언제나 도전자였고 그 누구보다 많은 경기를 치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빡빡한 훈련스케줄을 소화했다.

승리에의 집착, 패배에의 공포

크로캅은 그 누구보다 승리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승리에의 열망, 상승욕구, 자부심 등이 양각된 곳이 바로 링이었다. 링에서 그는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빠른 스텝과 강력한 하이킥을 뽐내며 한방에 승부를 마침표 찍는 경이적인 장면을 자주 연출했고 관중들은 불꽃처럼 열광했다. 그렇게 그는 K-1에서 PRIDE로 그리고 UFC와 DREAM으로 전쟁터를 옮겨다니며 매번 정처 없이 떠돌았다.

반면 그는 누구보다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패배에 대한 두려움, 불안, 초조함 등이 음각된 곳이 바로 그의 자택 지하에 위치함 짐(Gym)이었다. 그는 패배의 두려움과 불안을 상대로 자신의 집 지하에서 숨어서 싸웠다. 다른 어떤 팀에도 합류하지 않고 오직 오래된 자신의 동료들과 운동했다. 가끔씩 다른 유명선수들을 초빙하기는 했지만 역시 다른 나라, 다른 장소, 다른 팀으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오직 자신의 지하 골방(?)에 틀어박혀 수련할 뿐.

그는 어쩌면 그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는 내면으로, 그 누구와도 주먹을 섞어야 하는 외부의 링에 올랐는지 모른다.

딱 한 번의 챔피언

그러고 보니 한 번, 그를 짓누르던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이 해체되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2006년 무제한급 GP였다. 크로캅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영예를 누린다(물론 표도르가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생애 처음으로 허리에 챔피언 벨트가 감길 때, 크로캅은 짧게나마 눈물을 보였다. 그때의 그 모습은 승리에의 기쁨이라던가 도취감 같은 감정보다는 꼭 오랜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은 피고인이 느끼는 안도감, 홀가분함 같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재빠르게 눈물을 닦아낸 크로캅은 이내 마이크 어필을 통해 "오늘의 나에겐 효도르도 안 됐을 것"이라는 표도르를 의식한 '도전자스러운' 발언을 했고(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른 채), 얼마 후 당시로선 매우 충격적이게도 표도르가 없는 UFC라는 새로운 무대에의 도전 길에 오른다.

늙은 무사의 조각난 '프라이드'

UFC이적 후 크로캅은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렸다. 특히 가브리엘 '나파오' 곤자가에게 자신의 주무기인 하이킥으로 실신 KO를 당하며 전 세계 격투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팬들은 다시 한 번 더 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올 크로캅을 기다렸지만, 칙 콩고 전의 패배와 무효 처리된 알리스타 오브레임 전에서 보여준 졸전 등으로 팬들은 그에게서 기대를 조금씩 거둬갔다.

대신 오브레임을 비롯한 경쟁관계의 파이터들과 안티 팬들의 조롱과 비웃음은 갈수록 증가했다. 그 과정에서 예민하고 자부심 강하기로 소문난 크로캅이 받았을 상처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컸을 것이다.

크로캅은 경기에서 질 때마다 프라이드시절처럼 그저 자기 자신을 더욱 혹독하게 채찍질했다. 하지만 예전 같은 몸놀림은 살아나지 않았고 오히려 신체의 크고 작은 부상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래도 크로캅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루 빨리 경기를 이겨서 조각난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뿐. 결국 그 조급한 '프라이드'가 주니오르 도스 산토스에게 마치 깨진 유리처럼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크로캅의 행보

여기까지 글을 이어간 끝에 얻은 것이 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 우리네 갑남을녀들과는 너무도 다른 신체 능력과 커리어를 쌓아간 크로캅이 사실은 우리네 장삼이사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그렇게 정점을 향해 좌충우돌하며 꾸역꾸역 올라갔고, 또 그렇게 그곳에서 다시 너무나 거칠고 갑작스럽게 추방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크로캅이 UFC에서 보여준 실패의 파편들을 나부터라도 좀 아름답게 봐줘야 하지 않나 하고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물론 크로캅 스스로는 UFC103에서 주니오르 도스 산토스와의 경기 패배 후 "프라이드 무차별급 GP가 끝나고 은퇴했어야 했다"고 말했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은 나이가 들면 육체적인 능력이 저하되고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된다. 최고의 모습일 때 은퇴를 했다하여 그가 영원히 최고의 모습인 상태로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다. 기량이 저하된 모습을 들키지 않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락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순리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약체와의 대전을 치를 수 있는 드림에 남기를 거부하고 최고의 무대인 UFC로 돌아와서 실제로 챔피언이 되기 위해, 여전히 이기기 위해 도전한 크로캅의 행보는 우리에게 또 다른 종류의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 시인의 유명한 시구처럼 그 누구에게도 크로캅을 다그치거나 조롱할 자격은 없을 듯하다. 그동안 크로캅은 링에서, 그리고 케이지에서 좌절과 극복을 롤러코스터 타듯 반복하며 '거의' 정점에까지 발을 디뎠고, 그 정점에서 거칠게 떨어지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줬다.

이제 그의 드라마는 거의 막을 내린 듯하다. 그가 쓴 드라마의 장면 장면은 너무나 화려하고 요란스러웠지만 그가 쓴 드라마의 행간 행간은 사실 너무나 소박하고 익숙한 것들이었다. 바로 우리네들이 다 알고 있는 상승욕구, 두려움, 불안, 그리고 그것의 실현 혹은 극복을 위한 초인적인 노력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가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의 마지막 라운드가 못내 아쉬워서, 혹 2006년의 크로캅처럼 촌스러운 눈물을 훔치게 될까봐, 감은 눈을 뜰 수가 없다.

조영훈 칼럼니스트(libero1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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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훈 칼럼니스트(libero1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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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MFIGHT ZER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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