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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와 무관치 않은 민족일보사건

vicsteel 2010. 5. 27. 15:25

한국에서 전화가 온것은 7일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B씨로부터 였다.

 

"M님이십니까? 진실과 화해의 B 입니다. 지난번 일본 현지 조사때는 많은 협력과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결론이 내려져 발표되었습니다. 진실위의 홈페이지에 상황보고글을 올려야 되지만 아직 준비가 덜되어 우선 전화로 알려 드립니다. 각 메스컴에는 이미 공표하였습니다. 사장님께도 이 말씀 전해주시고 M님께서 매스컴의 보도내용도 아울러 사장님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9월 그러니까 북한의 핵 실험이 있던 날과 그 다음날...

나는 한국에서 온 조사관 두명과 하루종일 민족일보당시의 자료 찾기와 당시의 상황증거물 찾기에 모든 다른 업무를 희생해야 했지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협력을 했다.

 

그리하여 진실위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 me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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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가 28일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처형 사건(이하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당시 집권세력의 정치적인 필요에 따른 자의적인 법적용으로 희생됐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진실위 출범 1년 만에 첫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것으로 과거사 정리 작업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진실위는 이날 전체위원회를 열고 1961년 당시 혁명재판소가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법적용을 잘못했고 조씨에 대해 내린 사형선고 혐의가 사실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법원의 확정판결이 잘못된 결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혁명재판소는 조사장에게 ‘사회대중당 간부로서 북한의 활동에 고무 동조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조사장은 사회대중당 간부가 아니고 사설을 통해 북한을 고무 동조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법적용 대상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진실위는 당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소장한 사회대중당 관련 자료를 입수해 조사장이 정당의 간부가 아니었고, 재판 자료로 제출됐던 민족일보의 사설 및 기사내용을 검토한 결과 북한체제나 김일성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실위는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를 3년6개월 이전까지 소급 적용한 것, 혁명재판소라는 이유로 2심제로 재판이 진행된 점 모두 위헌소지가 있고 국민의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진실위는 “국가는 피해자 조용수 및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 등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번 결정으로 언론사 재산몰수, 발행인 사형 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상당한 규모의 국가 배상도 뒤따를 전망이다.

진실위 관계자는 “피해보상, 명예회복 방법과 규모는 향후 다시 전체위원회를 통해 논의,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위는 12월 중 대통령과 국회에 진상규명 결정 내용을 보고할 예정이다.

조사장의 동생인 조용준씨(73)는 진실위의 결정에 대해 “사필귀정”이라면서 “민족일보 사건만으로 일단락될 것이 아니라 과거 정부의 사법적 오류들을 계속 바로잡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씨는 또 “법원에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진실위는 ‘김익환 일가 고문·가혹행위 사건’에 대해서도 불법감금과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김익환씨(당시 42세) 등 3명은 1971년 9월 중앙정보부 여수출장소 소속 직원들에게 간첩관련자로 강제연행돼 5일간 감금, 고문·가혹행위를 당했다. 진실위는 조사 후 풀려난 뒤 지금까지 정신장애·고문후유증에 시달리는 김씨 일가에 대해 “이 사건은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당시 정권의 과도한 반공정책의 희생양이 돼 수십년간 고통을 안고 살아온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진실위는 이어 “국가는 피해자들과 가족에게 사과하고 유가족과 화해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한시적 독립기구인 진실위는 지난해 12월1일 항일독립운동과 광복 이후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및 민간인집단 희생사건 등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출범했다. 지금까지 7,633건의 진실규명 신청을 받았고 오는 30일 접수를 마감한다.


■ 결국 역사의 한 사건의 귀퉁이에서 나는 이 사건을 되돌아 보는 역할을 한 셈이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조용수에게 자금을 지원한 친북계 인물로 간첩으로 지목받은 이영근이라는 인물이야말로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의 창간자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후님마니님께서 우리집에 오셨을때 대학교 교수님인 남편께 보여드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로고가 들어간 팔목시계가 오랜 후에도 내가 아 사건을 떠 올리는 매체가 되리라. - melon-

 

 

※이 사건 조사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사장님과 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로고가 새겨진 기념시계를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이유는 ... 실무적인 차원의 이유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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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건이란-

한국 현대사의 최대 필화사건 중 하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혁신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한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같은해 12월21일 조용수 사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민족일보는 4·19 혁명 이듬해인 1961년 2월13일 창간, 급성장했으나 5·16 사흘 뒤 92호를 마지막으로 3개월 만에 강제 폐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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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인물 재조명> 
 

사법살인당한 민족일보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박윤석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ston@donga.com〉 기자의 글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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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2월13일 창간호 발행 이후 5·16군사쿠데타를 맞고 불과 3개월여 만에 지령(紙齡) 92호로 종간된 석간신문 「민족일보」의 발행인 조용수는 그해 연말 사형 집행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 한귀퉁이 언땅에 묻혔다가 수년 뒤 친지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었다. 무슨 조화였는지 그의 형 집행은 첫 교수에서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재차 교수를 하게 돼 통상 10분 남짓 걸리는 시간을 훨씬 넘겨 18분이 소요됐고, 묘지 이장 때는 몸이 채 흙이 되지 않은 채였다.

그의 동료였거나 그와 일면식도 없이 사후 그를 추도해온 사람들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영광스런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했다. 그러나 나약한 장면 정권은 선건설 후통일이라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을 내걸고 혁명과업의 사보타주를 일삼았다. 조사장은 민족일보를 창간해 민족·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반민족 반민주 세력이 궁지에 몰리자 박정희 일파는 5·16군사쿠데타를 자행, 조사장에게 가당찮은 누명을 씌워 희생양으로 삼았다. 조사장이 만약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들 지금 마치 물고기가 바닷속을 헤엄치듯 조국의 민주와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내년에는 좀더 보람있는 보고를 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

『민족일보는 한 단체의 기관지가 아니라 민주·자주·통일 세력의 공동 신문이었다. 박정희가 미국의 성미에 맞추기 위해 제물로 바쳤다』

『판결문을 검토해 봤지만 사형으로 몰고 갈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어 사법살인임을 단정한다. 아직껏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크게 분노한다. 재심(再審) 절차를 밟아 역사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나라와 통일을 위해 죽어갔다는 사실을 정사(正史)에 남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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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찬탈 과정에 계획된 사법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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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식 후 참석자들은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 국회에서 추진중인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 이후 기념사업을 통해 평화 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요약되는 진상규명추진위원회 발족의 의미에 대해 이날 위원 100여명의 서명을 받아 낭독된 취지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61년 소위 혁명재판소에서 자행된 민족일보에 대한 반민주적·반민족적 재판은 여전히 우리 언론사는 물론, 통일운동사에 크나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언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례는 우리나라는 물론,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나라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일보는 4·19 혁명이라는 당시 시대상황을 민족적 관점에서 가장 정확히 반영한 신문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에게 가해진 폐간과 사형은 4·19혁명정신을 부정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말살시킨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민족일보 사건이 쿠데타를 통한 정권찬탈 과정에 계획된 사건의 하나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 민족민주열사 정신계승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다. 또 조용수 사장이 목숨으로 절규했던 평화통일론이라는 통일방법론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수긍하는 가장 합당한 통일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그가 민족일보의 폐간과 목숨으로 바꾼 평화통일 기운은 작금의 통일 꽃망울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하려 한다.

그러나 민족일보 사건의 언론사적 위치와 사장 조용수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여전히 배타적 암흑 속에 있다. 우리는 늦었지만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 사장의 죽음을 재규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 동안 민족일보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진상규명 노력이 있었지만 관련자의 비협조와 정권 당국자의 망각으로 번번이 한계에 부딪혀왔다』

20세기를 접어가는 지금, 민족일보와 조용수는 일부 제한된 세대, 그중에서도 일부 제한된 사람들 외에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되어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사건 이후 30여년 동안 간간이 현대사를 정리하는 과정에 몇몇 필자에 의해 단편적으로 언급돼왔고, 그간의 자료와 관계자의 증언을 종합해 95년 간행된 단행본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원희복 저·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발행)에서 가장 세밀히 집대성된 바 있다. 그 사건의 전말과 왜 지금 다시 그 사건이 재론되는가를 간략히 요약해 본다면, 조용수의 동생이자 민족일보의 기획부장 직책으로 경영 실무를 도운 바 있는 조용준이 유족대표 자격으로 98년 12월8일 집권여당 국민회의 총재 앞으로 제출한 진상규명 탄원서의 구절처럼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조용수는 1961년 1월25일 주식회사 민족일보를 설립하고 발행인으로 취임, 소급 입법· 증거 불충분·재판과정의 불법 등 문제가 많은 재판을 통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그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제정된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의해 사형이 선고됐다.

과거에는 합법이던 것을 후에 제정된 특별법을 소급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중대한 법률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그에게 적용된 특별법 6조,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 선동 교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대목은 조용수 본인과 전혀 관계가 없는 대목이다.

그는 정당의 주요간부라는 혐의로 이 법조문의 적용을 받았는데, 조용수의 정당활동은 1960년 7월29일 총선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한번 출마해 낙선한 것이 전부이며 민족일보를 발행할 당시 어떠한 정당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의 당수를 비롯해 주요간부 중 특별법 6조에 의거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된 사람은 없다』

혁명재판소는 조용수가 당시 일본에 있는 간첩 이영근이란 사람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4650만환과 3810만환을 공작금으로 받아 선거에 출마하는 한편 민족일보를 발행한 것으로 판결했었다. 이 자금 문제는 조용수를 사형으로 몰고간 핵심이었다. 이에 대해 탄원서는 그간의 항변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조용수가 이영근으로부터 이 금액을 받은 사실도 없고, 이영근이 간첩이라는 증거도 없다. 피의자 진술 어디에도 없고 또 재판과정에 하나도 인정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재판부는 그와 같이 판결했다.

이영근은 조용수 사후 국내에도 자주 왕래했으며 이영근이 창간하고 실질적으로 운영한 「통일일보」는 국내 지사까지 설치돼 있다. 간첩이 창간하고 운영한 신문의 서울지사가 버젓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1990년 5월 이영근이 일본에서 사망하자 우리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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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재판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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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재판소는 민족일보가 19개 항목의 사설, 논설, 기사 등을 통해 무정견한 중립화론이나 정치적 평화통일, 남북협상, 경제·서신·문화 교류 등을 선전 선동해 반국가단체인 북한 괴뢰집단을 고무 동조했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한 탄원서의 항변.

『그러나 당시 국내 신문 중 유독 민족일보만 이러한 기사를 게재한 것이 아니라 기타 신문에서도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과격한 기사를 많이 게재했다. 재판부는 민족일보 사설과 논설의 전반적인 기조인 대한민국의 민주발전 촉구와 북한체제에 대한 비난은 간과하고 부분적인 것만 문제삼아 막연히 북한에 동조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것은 유독 민족일보를 겨냥한 판결로밖에 볼 수 없으며, 어떻게든 조용수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군사정권의 치밀한 계획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다.

평화통일, 남북협상교류는 현재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방안의 기본적 이념이다. 조용수가 민족을 생각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다는 방증이 될지언정 범죄행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같은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고 또 혐의를 받았던 사람들은 그후 정부 요직에 기용되거나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사형이 집행된 조용수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적 복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용수 사후 유족들은 이전에도 두 차례 당국에 진정서를 낸 바 있다. 1966년과 1993년 각각 제출된 이 진정서는 1998년의 그것과는 달리 거의 「읍소」에 가까운 호소를 담고 있었다. 문민정부하의 93년 10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의 요지.

『신한국 창조에 매진하고 있는 대통령 각하. 본인은 1961년 5월 군사쿠데타에 의해 단죄됐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친동생 조용준이라고 합니다. 창간된 민족일보는 장면 정권에서 인쇄중지라는 결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으로 계셨던 각하께서는 「이승만 정권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언론탄압이다. 민족일보가 장총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인쇄중지 결정을 내린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승만정권이 폐간했던 경향신문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씀으로 민주적 언론관과 의지를 보여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30여년이 지난 지금 저의 형에 대하여 새로운 주장을 한다고 해도 죽은 형이 살아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가문은 30여년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왔고, 연로한 아버님은 가장 기대했던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아직까지 고생하고 계십니다. 저희 집안은 경남 함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저희 외삼촌이 2, 3, 4대 민의원을 지냈던 하만복입니다. 새로운 문민시대를 맞아 저희 집안에서는 조용수의 삶을 정리해 우리 가문의 명예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습니다. 그 중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관계 서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정부기록보존소를 비롯한 각종 기관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재판관련 자료를 수소문해 본 결과, 그 서류는 영구보관 문서로 분류되어 서울지방검찰청 자료관리실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지방검찰청 자료관리과에서는 이미 30년이 지난 재판관계 서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부디 그 당시의 기록을 열람, 등사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청와대로부터는 민원을 서울지검에 보냈다는 회신이 왔으나 서울지검에서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이후 확인한 바로는 민족일보 재판관계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혁명검찰부 보존기록 순위 1번인 이 기록은 영구보관 규정과는 달리 오래 전부터 엉뚱한 곳에서 잠자고 있거나 아니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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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학생 협박받고 중학 자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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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훨씬 앞서 1966년 조용수의 아버지가 집권여당 민주공화당 의장 앞으로 보낸 진정서는 눈물겨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수년 전 고인이 됐다.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 귀하. 정사다망하신 귀하에게 이러한 일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죄송합니다. 넓게 용서하여 주시고 관대하신 통촉을 바랍니다. 본인은 소위 민족일보사 사건으로 인하여 사형을 당한 조용수의 아버지이오며 현재 민족일보사의 청산에 대한 법정대리인입니다. 그 당시에 자식을 가장 불명예스럽게 잃어버리고 겹쳐서 전재산을 치안국에 압수당하였던 바, 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범죄자는 처형하였더라도 그 재산만은 환부하라는 발표도 있었고, 검찰총장으로부터 재산은 몰수치 않으며 법정대리인을 선정해 재산 압수 환부신청을 제출하라는 통고에 의하여 변호사를 선정하여 신청서를 제출하였던 바, 대검찰청에서 치안국장에게 그 재산을 환부하라는 지시명령서를 발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산은 5·16혁명 직후부터 사실상 중앙정보부 유대위가 강압몰수하여 2대의 승용 지프를 비롯하여 압수물 일체를 사용해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치안국은 부득이 검찰청 지시명령서의 뜻을 중앙정보부에 통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중앙정보부 경리계장인 이대위가 법정대리인을 방문하여 구구한 말을 하면서 한달 남짓 시간적 여유를 주면 꼭 환부하겠다고 하여 부득이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경과하도록 약속을 이행치 않기에 다시 독촉통고를 하니 다시 한 번 더 연기하여주기를 간청했는데 뜻밖에 중앙정보부에서는 그 재산을 처분했다는 것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 재산이 과연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압수된 것인지, 지금까지 국고에 보관돼 있는지 혹은 개인이 착복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본인은 혁명 당초부터 이런 사유로 돌연 무일푼의 가련한 신세가 된 데다 겸하여 불구의 몸으로 13명의 노유(老幼)가족을 거느리고 실로 인간 이하의 비참한 형태 속에서 모진 목숨을 이어왔습니다』

12대 할아버지가 세자의 스승을 지낸 것을 가문의 영예로 삼고 있는 완고한 양반가문 함안 조씨 태생이었던 조용수의 아버지는 서부 경남의 만석꾼으로 통하던 진양의 하진사댁 큰딸과 혼인, 네 아들을 두었다. 동경의 예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결혼 직후 신행길에 입은 다리 부상으로 평생 불구로 지냈으며 사진작가로 활동,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목을 빼고 모이를 다투는 병아리들을 찍은 그 출품작은 국회에서 의원들이 서로 공명을 다투는 모양새를 비유한 것이라 했다. 그의 큰형은 경남 도의원을 지낸 조찬규였고, 둘째 형은 일제시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경성제대 산부인과 의사로 근무하다 대구신보·시사신보 사장을 지낸 뒤 2, 3, 4대 국회의원 및 자유당 원내총무를 두 차례 지낸 조경규였다.

이러한 내력의 집안에 차남으로 태어난 조용수는 대구에 정착한 가족과 떨어져 어릴 때부터 자식이 없는 진주의 외삼촌 집에서 성장했다. 외삼촌 하만복은 과도정부 입법의원, 반민특위 위원, 그리고 국회의원을 지낸 재력가이자 명망가였다. 방학이 되면 가족들이 진주 외가로 놀러왔고 조용수는 가족을 따라 대구를 다녀오곤 했다.

조용수의 아버지는 처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별다른 생활고 없이 대구에 사진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예술가 혹은 한량으로 지냈다. 어린 시절 조용수과 그의 동생은 가수 백년설 등 연예인들이 아버지의 스튜디오에 놀러와 기타 치며 노래부르고 노는 것을 보기도 했다.

진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을 다니면서 거의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조용수는 광복 다음해인 중학 3년 때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진 좌우익 노선대결의 와중에 우익 입장을 취해 좌익학생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자퇴, 대구로 전학했다. 대구 대륜중학 동기동창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그를 「공부 잘하고 원칙과 집념, 그리고 명예욕이 강했던 친구」로 기억한다.

삼촌과 외삼촌 모두가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인지 정치에 민감했던 조용수는 1950년 연희전문 정경학부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부산에 내려가 외삼촌 하만복의원의 경호비서로 일했다.

전쟁통의 아수라 정치판은 그를 오래 붙들지 못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더 넓은 곳에서 학업을 닦으라는 주변 권고를 받아들여 51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 정경학부 2학년에 편입학했다. 이때부터 꿈과 혈기 가득한 20대 전체를 그는 사실상 일본에서 보냈다. 4·19가 그를 부르기 전까지는.

동경대에 다닐 때 조용수와 함께 하숙을 하며 가까이 지냈고 이후 이영근 밑에서 통일일보 편집장을 맡기도 해 지금까지 조용수 개인 및 조용수 사건과 관련한 핵심적 증언을 해온 윤숙일에 따르면, 당시 조용수는 치열한 좌우익 논쟁이 벌어질 때면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사고나 행동에 있어서 자유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53년 재일본 한국학생동맹 문화위원으로 선출됐다. 한편으로 그는 민단 기관지인 민주신문사 등에서 언론인 자질도 닦았다. 이 시기 그는 학비와 생활비 대부분을 고향에서 인편을 통해 오는 돈과 클래식음악 잡지에 음악평을 기고하는 등 아르바이트로 벌충해 해결했다.

졸업 후 그는 한국 거류민단 중앙총본부 차장으로 선임되는 한편, 민주신문의 상임논설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는 일찍부터 정치감각 외에도 문필가적 재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신격호 등 재일 한국인 청년 실업가들과도 친분을 쌓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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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구명·재일동포 북송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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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1959년 찾아왔다. 59년은 되돌아보면 그의 운명의 서곡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해이기도 했다.

그해 2월 이승만의 오랜 정적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본국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기가 쉽지 않은 민단이지만 일각에서 조봉암 구명위원회가 조직됐다. 이 일에 열성적으로 뛰어든 조용수는 22만명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맡았다. 그해 7월 조봉암의 사형은 집행됐고 민단 내부도 친정부 일색으로 물갈이됐다. 조용수는 8월 조봉암 추도회까지 앞장서 마무리했다. 이 일로 그는 조봉암의 비서출신인 이영근을 만나게 됐다. 이영근은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에 연루됐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틈에 일본으로 망명, 동경에서 「통일조선신문」을 만들며 반이승만 운동을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 이영근은 조봉암이 공산주의자였을 때 함께 공산주의자였고, 조봉암이 전향했을 때 역시 전향했으며,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농림부장관을 할 때 과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다.

조봉암 구명운동의 파문으로 조용수는 민단에서 견책을 받고 동경 외곽 소도시의 부단장으로 좌천됐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는 또 다른 과업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일동포 북송 반대 투쟁이었다. 1956년부터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 노력의 일환으로 논의된 북송방침이 일본 각의에 의해 59년 2월 정식 결정된 이래 한국 정부와 재일 거류민단의 반대움직임이 날로 거세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해 12월11일 조용수를 비롯한 민단의 청년 결사대원 500여명은 동경 신주쿠역에 집결, 북송작업이 이뤄지는 역 구내 철로에 누워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 광경은 조용수의 모습이 선명히 부각된 채 당시 중앙공보부에 의해 촬영돼 영화관 뉴스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 자료는 이후 조용수가 조총련계와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증거의 하나로 제시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 차례 정치행동에서 좌절을 겪은 조용수는 1960년 3월 재일동포 2세와 결혼했으나 4·19혁명 두 달 후인 6월 급거 귀국했다. 7·29총선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문중이 많이 사는 경북 청송에 출마한 그는 앞으로의 정당정치가 보수와 혁신의 양당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금의 빈곤이 광복 후 보수 정객들만의 절름발이 정당정치와 반공이라는 구실 하에 혁신 정객을 탄압한 결과』라며 『보수정당과 혁신정당을 상호 육성하여 이념적 대결의 정당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3위로 낙선했다. 그는 고국에서 다시 좌절을 맛보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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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이라고 불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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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과정을 통해 조용수는 혁신계에 대한 일반의 과잉경계 및 혁신계 내부의 분열상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통일을 갈망하는 세력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문제에 나름대로 골몰하던 그는 이영근과 대화하던 중 신문 창간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낸 것으로 전해진다.

조용수는 이영근을 통해 당시 재일동포사회에서 제1의 재력가로 통하던 박용구라는 인물을 소개받았다. 고리대금과 부동산업을 기반으로 일본 정재계에 막강한 인맥을 갖고 있던 박용구는 민단 내에서 혁신계로 분류되는 사람이었다. 조용수는 박용구로부터 자금지원을 약속받는 한편, 이영근의 소개로 때마침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송지영을 만나는 등 신문창간에 참가할 인사들을 구상한 뒤 60년 12월 귀국, 혁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차례로 접촉했다.

4면짜리 신문 창간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61년 1월19일 조용수는 일간 신문 광고를 통해 민족일보 창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며 이 새로운 신문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전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 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정력을 바치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간에 유혈의 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며, 조국의 통일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민주적 애국지사들에게는 가장 열정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민족일보는 혁신적이라고 불려도 좋다는 것입니다』

창간호 발행 직후부터 과감한 논조와 신선한 편집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민족일보는 곧 유력 대중지에 육박하는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민족일보는 때마침 「굴욕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던 한미경제협정문제 등을 이슈로 장면정권을 혹독하게 몰아붙였고, 장면 정부는 이에 대응해 서울신문이 대행해 주고 있던 민족일보 인쇄작업을 중단시켰다.

게다가 민족일보 창간 전부터 이미 국회에서는 「조총련계 자금줄이 있다」는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당시 신민당 소속 민의원 김영삼(金泳三)은 신문탄압의 공통점을 들어 장면정부의 폭거를 이승만 정부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싸잡아 매도했고,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 김대중(金大中)은 『우리 당으로서는 그 해약지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또한 정부와 민주당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당시 언론계 동향을 알리는 『신문평론』은 창간 3주일이 된 민족일보를 이렇게 평했다.

『민족일보가 펜대만 들고 나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차림으로 발족했지만 5만부를 발행하게 된 것은 어용지 보수지의 장난에 증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국민들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혁신계 신문의 발간을 기성 신문도 집권당이나 보수정파와 똑같은 이해타산으로 백안시하고 있다. 민주당 정부가 자기 무능과 부패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결의가 없고, 기성 언론계가 낡고 썩은 보수에 도취하여 장단을 맞추고 있는 한 혁신계 신문은 국민의 편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나갈 것이다. 민족일보는 그 첫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조용수는 사장 신분으로 직접 사설을 쓰고 장면 정부가 추진중인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 등 2대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연사로 거리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남북교류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갖고 신문제작에 임했다. 민족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집중 비난에 김대중 민주당대변인은 『이 반공임시특별법의 입법취지가 언론이나 혁신세력의 탄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조용수는 어디론가를 향해 분명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듯 보였다. 그 행로의 초반에 운명을 조기에 결정해버린 것은 5·1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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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업 수행에 영광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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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오후 조용수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청취하던 중 「한때 좌익 경험 유」 부분에서 나름대로 안도했다.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 정권을 잡으면 민족일보도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이 있었다. 더구나 대구폭동 당시 남로당 구미군책으로 경찰에 사살됐던 박상희의 딸과 결혼했고, 얼마 전 군 하극상 사건으로 예편한 김종필이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은 왠지 그를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쓴 5월17일자 사설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끝으로 우방제국에 일언을 부치노니, 이 군사혁명이 발생된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우호를 베풀어 주기를 진심으로 희구해 마지않는다. 우리는 거듭 내치 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 있기를 바라는 바다』

다음날인 18일 아침 조용수는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통화, 일본으로 잠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자신의 거취를 상의했으나 『민족일보와는 아무 상관없는 쿠데타인 것 같으니 걱정 말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연행됐다. 곧 풀려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나흘 만인 22일 치안국은 「민족일보와 동사 사장 조용수 일당들의 죄상 및 배후관계」를 발표했다. 3년 6개월까지 소급적용키로 하고 만든 특별법에 근거한 혁명재판에서 합리적인 법리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제대로 기능하지도 못했다.

이 혁명재판에 심판관으로 참여한 이회창(李會昌)은 후일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와 일전을 앞둔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시절, 회고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막 군 법무관에 임관된 상태에서 혁재로부터 인원차출 지시가 왔는데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해 나이 어린 순으로 차출되다 보니 세 명의 심판관 중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됐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용수의 용모는 준수했으며 심문에도 똑똑히 대답해 사형을 내리기에는 아까운 젊은이였다』

민족일보는 폐간돼 직원들은 흩어졌고 조용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해외에서는 각종 단체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국내에서는 아무런 공개적 항의도 없었다. 12월21일 오후 조용수는 4·19 발포책임자 최인규와 곽영주, 정치깡패 임화수,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 등과 함께 차례로 사형대에 올랐다.

이들 5명에 대한 사형집행을 최종 재가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날 오후 제1군사령부에서 있은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 사령부 전 장병에 대한 훈시를 통해 『혁명 후 지난 반년 동안은 정지(整地)작업이었다』고 비유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여 공산군을 막는 일과 빈곤과 후진성에서 탈피하기 위한 조속한 경제재건사업』이라고 역설했다.

전날 밤 개최된 유엔총회는 『미국정부는 분단된 한국의 통일을 계속 추구할 것』이라는 미국 대표의 발언 뒤 실시한 표결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대의(代議)정부형태하의 통일, 민주한국의 수립과 이 지역의 국제적 평화를 달성한다』는 유엔의 목적을 압도적 결의로 재확인했다. 조용수가 숨지던 날 한 석간신문의 사설은 『統韓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을 유엔이 밝히고 또 그 원인 제거를 위한 대책까지 강구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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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의 인물, 이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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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동의 옛 민족일보사 부지에 인접한 건물 한켠에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 위원회」 임시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민족일보 폐간, 조용수 사장 사형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던 옛 동지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이제 조용수 37주기를 계기로 이곳에서 자주 모인다. 칠순이 된 김자동 전 민족일보 기자가 진상규명위원회 회장직을 맡은 이 위원회 사무실에서, 조용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복권을 위한 오랜 구상을 실현에 옮기려 하고 있다. 가건물 형태로 있었던 민족일보 사옥은 오래 전 철거돼 이제 진상규명위원회가 들어 있는 건물의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민족일보와 관련된 많은 것이 사라져 되돌릴 수 없지만 의혹투성이 재판기록, 특히 조용수의 진술기록은 어딘가에 남아 있기만 하다면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비원이다. 그 기록은 재심을 청구하기 위한 1차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80년대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문민정부에 들어와서조차 그들이 희망과는 달리 감히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 이유는 근거자료 미비로 일단 기각되는 날이면 두 번 다시 재심의 기회는 없어진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지금이라고 그러한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정부」가 제정하리라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한가닥 심적 의지가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5·16 직후 한때 조용수와 같은 감방 안에서 기거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한성 4학당 중 한 곳인 서학당(西學堂) 자리인 이 터에서 청춘의 짧은 시기를 함께 연소시켰던 조용수를 생각하며 동생 조용준은 37년 만에 다시 이곳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나름대로 맥을 잡아보았던 사건의 전말, 특히 의혹 부분을 다시 정리해 보고 있다.

그 모든 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조총련의 자금줄이었다고 지목한 이영근에 대한 기초 파일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혁명검찰부에 의해 어설프게 마련된 시나리오와 그를 단순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 재판부의 실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것이 없다.

그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영근이라는 존재 자체 및 조용수와의 관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이다. 그가 형으로부터 직접 듣고, 형과 이영근의 관계를 가까이서 지켜본 주변 인물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종합해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이 당시의 정황을 재구성하고 있다.

… 민단계 조총련계 양쪽에 모두 선을 대고 있던 대표적 인물인 이영근은 재일동포 중 최고 재력가로 꼽히는 박용구를 조용수에게 소개했다. 정치적으로는 민단 내 좌파쯤으로 분류되고 재력으로는 국내 삼성의 이병철보다 세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박용구는 조용수를 조국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해 줄 전위대로 인식했다. 민족일보 창립자금으로 건네진 돈은 순전히 박용구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박용구로서는 그야말로 「포켓머니」에 불과한 소액을 달러로 1차 환전해 준 것이다. 최대의 물주였던 박용구는 이후의 계속적인 지원계획을 조용수에게 제시했고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사업계획을 진행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자체 재정 기반이 없는 이영근은 여러 채널로 조용수에 대한 후원금을 갹출했다. 당시 재일동포 사회의 정황과 이영근의 독특한 양면적 입지로 미루어 민단은 물론 조총련계 동포들로부터도 개인적 성금을 받아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는 그 돈을 착복한 의혹이 짙다. 조용수가 이영근으로부터 구한 것은 조언과 인맥이었지, 돈은 받지도 않았고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영근의 일본인 처는 갑자기 고가의 보석으로 치장하기 시작해 동포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그러던 이영근은 어느 시점부터 중간에서 제동을 걸어 박용구의 자금지원을 차단시켰다. 민족일보는 한때 신문용지 대금을 대지 못해 허덕이는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조용수는 이 시기 동창 등 친지들에게 백방으로 자금 지원을 호소하며 어렵게 회사를 꾸려나갔다. 이영근은 얼굴 마담 쯤으로 여겼던 조용수가 막상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양태로 신문 필진과 논조를 꾸려나가는 데 불만을 가졌던 듯하다. 조사장 배척을 위한 모함도 이영근에 의해 암암리에 진행됐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조용수는 그렇잖아도 각 당파가 민족일보를 각각의 당리당략에 이용하려는 풍토 속에 사장 자리를 내놓고 미국으로 유학 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 교수로 있던 사촌형 조용삼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5·16 직전이었다.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두 달째 접어들 무렵 조용수는 동생에게 이례적으로 이영근에 대한 인물평을 한 일이 있다.

『그는 동경에서 유능한 청년들을 가까이 불러 능란한 처세술로 사로잡는다. 웬만한 유학생은 며칠 동안 설득당하면 혹한다. 생명을 다해 충성할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한동안 애지중지하다 언젠가 내친다.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이 속출한다. 그런데 그는 1, 2년 후 그들에게 다시 접근해 더 꼼짝 못하게 당기는 이율배반적인 인품을 지니고 있다』

이영근에 대해서는 「저울같이 기우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조용수는 그의 내면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던 듯 하다. 이영근은 당시 조총련과 민단, 북한과 남한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평가를 스스로에게 내리고 있었다. 조용수 사후 이영근은 한국을 내왕하며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통일조선신문」을 「통일일보」로 바꿔 일본 내의 대표적 친한파 신문으로 성장시켰다. …

※ 이 부분, 이영근에 관한 동생의 증언은 억측에 불과하다.

 

아마도 형은 사형되고 이영근은 그후에 언론인으로서 일본 아사히 신문에 통일에 관한 그의 이론이 크게 다루어지는등 많은 부분 민단의 발전과 대한민국의 통일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면 이런 오해도 있는 모양이나 실제적으로 민족일보 사건당시 조용수 사장의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고 크게 보도하며 구명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발행된 민족일보는 창간호부터 모두 통일일보사에 보관되어 있다. 물론 데이터화도 되어있다    - melon-

 

※아래 신문은 이영근이 만든 신문 "통일조선신문"  ( 현 일본발행 통일일보 전신)

 

 

전대미문의 흉폭하기 이를데 없는 언론탄압  (1961년9월2일 토요일)  

 

 

민족일보사건 항의 구원운동 세계적으로 퍼지다  (1961년9월9일 토요일)  ↓ 

 

 

민족일보 4씨의 상소 기각 변호인의 변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961년11월2일 목요일)  

 

 

민족일보 간부 석방투쟁에 궐기하라  (1961년11월9일 목요일) 

 

 

조용수 사장 처살되다  (1961년12월21일 목요일)

 

 

세계중에 항의의 목소리, 국제세론 무시하고 처살  (1962년1월13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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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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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 사후 통일조선신문사는 「고 조용수 동지를 애도한다」는 추도사를 통해 『4·19로 희생된 젊은 열사들에게 바쳐진 노래로 조용수 동지가 가장 좋아하며 부르던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백만 송이 꽃을 피우고자/한 송이의 꽃은 져 가고…져버린 꽃을 아까워 하지 마라/꽃은 져야만 열매를 맺는다』는 노랫말을 인용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위의 「고 조용수 동지를 애도한다」의 통일조선신문사는 이영근씨가 당시에 만든 신문이며, 어느 신문보다 조용수씨의 무죄를 주장하고 구원에 노력했다. 이글을 쓴 동아일보의 박윤석 기자는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 melon-

 


조용수가 숨진 12월21일 저녁 한 석간 신문은 이 소식을 「부정선거 원흉 등 5명 사형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전하면서, 『조용수의 친동생이라는 청년이 「오늘 아침에도 면회까지 하였는데…사형을 집행하다니…」 하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고 서대문 형무소 앞 풍경을 묘사했다. 또 재일동포 실업인 시찰단이 혁명 후 모국의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이날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혁명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에 라디오 청취자들은 전파를 타고 온 크리스마스 선물을 듬뿍 받게 될 것이다. 서울중앙방송, 국제방송, 기독교방송, 문화방송은 다같이 성탄절 특집프로를 마련, 보도 교양 오락 프로를 크리스마스 일색으로 꾸며놓고 23일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내보내며 연 3일을 성탄축하 일색으로 맞게 할 것이다』

신문의 영화광고란은 전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광증과 불합리와 허무, 그리고 부질없는 죽음을 묘사한 말론 브랜도,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할리우드 대작 「젊은 사자들」이 이날 종로 우미관에서 개봉에 들어갔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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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사건에 이 사건의 진상을 지켜 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모르던 내가 근부하는 통일일보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는 깊으나 세상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일어판 한국계 신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일보는 크고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어깨에 싣고 그리고 오늘도 연연히 그 맥을 이어 간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던 당시의 통일조선신문에 존경의 마음을, 그리고 오늘을 쓰는 지금의 통일일보에 긍지를 가지고 오늘도 나의 일에 임한다.   

 

                                                                                                        - Melon in Tokyo Japan-

 



 

출처 : in Toky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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