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우리가 미련한 인간들에게 진 빚--유시민

vicsteel 2008. 11. 14. 23:35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과 그 후손,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생명과 건강을 잃은 분들의 명예를 높이고 재정적 지원을 하는 국가기관이 있다. 1999년 말 국회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 사람들에게 그와 유사한 대우를 해주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은 이미 "광주보상법"(약칭)에 따라 금전적 보상을 받은 바 있다.

 

도대체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한 걸 묻는다고 힐난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서","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를 배상하기 위해서" 등 여러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다  옳은 망리다.하지만 빠뜨리지 말아야 할 다른 축면이 있다. "경제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왜 그런지 따져보자.

"로 데려갔다.

 

수사관들은 두 학생을 반쯤 넋이 나갈 만큼 두들겨팬 다음에 가가 다른 지하 조사실에 가두었다. 다음날 새벽 조사 요원들이 한 학에게 말했다."이봐, 네 친구가 이미 다 불었으니까 너도 이제 자백해.너 마르크스-레닌주으자 맞지?" 그들은 다른 방의 학생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죄없는 두학생은 이렇게 해서 "죄수의 딜레마"라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둘 다 굳세게 고문을 견디면서 허위자백을 거부하면 둘 모두 유언비어 유포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살게 된다. 한사람이  자백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이 자백을 할 경우 자백을 한 쪽은 정상참작이 되어 징역 1년,자백을 거부한 쪽은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에다 괘씸죄까지 추가되어 징역 20년을 받는다.둘 다 모두 자백을 하면 둘 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을 받는다.

 

두사람은 만약 붙잡힐 경우 절대로 허위자백을 하지 말자고 약속한 적이 있다. 하지만 친구가 그 약속을 지키리라고 100%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 학생의 예상 형량은 이렇게 된다."친구가 의리를 지킨다고 가정할 경우,내가 자백하면 나는 징역 1년이고 자백을 하지 않으면 징역 3년이다. 고로 자백하는 편이 유리하가. 친구가 자백하는 경우,나도 자백하면 징역 10년이고 나만 자백을 거부하면 징역 20년이다. 역시 자백을 하는 편이 유리하다".이것을 하나의 "게임"이라고 보면, 두 학생 모두에게 자백은 친구가 어떤 션택을 하는 경우에도 유리한 절대적으로 "우월한 전략"이다.

 

경제학은 돈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 이후 주류경제학이 연구의 대상으로 선택한 인간은 "이기적 개인"이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개인이 오직 자신의 이기적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적 공동선이 저절로 이루어지로록 이끌어준다. 그것도 일부러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그런데 보안사 지하실의 가련한 학생들에게는 이"진리"가 통하지 않는다.그들이 징역을 하루라도 덜 살려는  이기젹 욕망만을 추구할 경우,친구야 어찌 되든 우월한 전략을 선택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둘 모두 이 전략을 택할 경우 그들은 각각 징역 10년을 받고 저마다 씁씁한 배신감과 양심의 가책을 안은 채 10년 징역을 살게 된다.

 

반면 둘 모두 의리를 지키면서,내가고생을  하는한이 있어도 친구를 위해 허위자백을 거부하겠다는 "비합리적 행동"또는 이타적 선택"을 할 경우 그들은 가슴 뿌듯한 우정과 동지애를 확인하면서 3년만 징역을 살아도 된다.  이기심을 버림으로써 두 사람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보다 유리한 결과를 얻는 것이다. 앞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했는데 이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도 허위자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역 3년만 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무기력한 "보이지 않는 손"

 

 경제학의 세계에서 "죄수 딜레마"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의심하게 만드는 중대한 도전이다. 만약 우리가 일상적으로이런 상황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경제학을 아버지"애덤 스미스 이후 수많은 철학자와 경제학자들이불변의 진리처럼 떠받들어온 "자유시장의 합리성"은 뿌리째 흔들리게 될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 "게임"의 성격을 조금만 바꾸어보자, 앞의 두 학생이 각자 친구를 배신한 대가로 10년 징역을 산 다음에 서로 진심으로 사죄와 화해를 하고 또다시 반정부운동을 함께 하다가 붙들렸다고 하자.

 

그들이 같은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은 10년 전보다 훨씬 적다. 만약 형량이 그렇게 무겁지 않고 구류 사흘과 열흘,그리고 20일이라고 하고,군사독재가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은 수없이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고 하자. 이른바 "반복된 게임"이다, 그러면 처음 한두번은 우월한 전략을 택했다가 열흘 구류를 살지도 모르겠지만 멍청이가 아닌  한 어는 시점부터인가는 서로 믿고 협력함으로써 언제가 구류 사흘만 살고 나오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게임에서는 이처럼 학습효과가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게임의 결과 역시 처음보다 좋아진다.

 

"게임"의 성격을 조금만 더 바꾸어 두명이 아니라 열 명이 보안사에 잡혀가서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하자. "게임참가자"의 수가 늘어나면 모두 자백하는 쪽으로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한 친구가 아니라 아홉 명의 친구가 모두 의리를 지킬 가능성은 훨씬 낮다. 그래서 이런 게임을 반복하더라도 누군가 "배신자"가 나올 가능성이 상존하게 되고, 이런 사실을 의식하면 모두가 자백하는 쪽을 택할 개연성이 커진다. 보안사가 대규모 조직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백 명쯤 구속하는 경우에는 거의 틀림없이 "배신자"가 생긴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시국사범"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죄수 딜레마"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모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갖가지 "멍청한 사태"의 원인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대표적인 사례가 환경오염이다. 예컨데 서울의 모든 가정에서 합성세제를 쓰는 바람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한강이 오염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모든 시민이 원인 제공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이합성세제 사용을 대폭 줄이거나 중단하는 것이라고 하자. 빨래와 설거지를 담당하는 여자(또는 남자) 개개인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언론이 아무리 열심히 합성세제 안 쓰기 또는 덜 쓰기 캠페인을 벌인다고 해도 "이기적 개인"의 "합리적 선택"은 하나 뿐이다. 서울 시민 개개인은 똑 같은 "죄수 딜레마"에 빠진다. 남들이 계속해서 합성세제를 쓴다고 가정하면 나도 쓰는 편이 유리하다. 남들이 합성세제 사용을 중단한다고 가정할 경우에도,나는 쓰는 것이 유리하다. 혼자만 쓴다면 수질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고, 빨래와 설거지가 잘되니까 편리해서 좋다.남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나에게는 합성세제를 쓰는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전략"인 것이다. 따라서 이기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개인으로 어루어진 "자유방임 체제"는 필연적으로 환경을 파괴한다.

 

이 "게임"의 참가자는 1천만 명이나 된다. 모든 "나"는 "나"를 제외한 9백9십9만9백99명의 "남"과 게임을 한다. 너무나 "남"의 수가 많기 때문에 "남"이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서울시민 전체가 합성세제 사용을 거부하는 결의대회를 연다고 해도, "남"이 배신할 확률이 너무 높기 때문에 "나"역시 배신할 수밖에 없다. 역대 정권이 5대 강의 수질 개선에 대한 야심 찬 공약을 내세웠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대부분의 오염물질 배출업소와 가정이 "남"의 선택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스스로 합성세제 사용을 자제하는 사람, 더 나아가 서는 폐유로 만든 저공해 비누를 이웃에 돌리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은 주류경제학이 전제로 삼는 "이기적 개인"과는 다른 속성을 지닌 인간들로서,경제학적 용어를 빌면 "이타적 선호"를 가진 괴짜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다 "배신"을 해도 개의치 않고 소신대로 행동한다. 한강의 수질 개선이라는 공동선을 이루려면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기적 개인의 "합리적 행동"은 환경 오염이라는 공동선의 피괴로 귀착된다. 정부가 이 문제를 자신의 과재로 삼는다면"오염시킨다"는 전략을 택한 시민들에게서 세금을 걷어서 환경운동의 비용을 지원해주어야 마땅하다. 합성세제 사용을 자제하는 데 따르는 불편,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이웃에 전파하느라 쓰는 시간과 돈, 이런 것이 모두 그들 스스로 감수하는 환경 보호의 비용이다. 이 비용을 '이타적 선호"를 가진 사람들만 치르게 하면서,그 덕분에 개선된 환경의 혜택은 모두가 누리게 하는 것은 명백히 "경제정의"에 어긋난다.

 

무임 승차는 없다.

 

"민주화 운동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문제도 이런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왜? 해방 이후 50년 동안 우리 정치는 언제나 국민들을 "죄수의 딜레마" 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다. 일단 한 가지 가정을 하자. 민주주의는 독재가와 그 앞잡이나 협력자 등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국민들에게 이익이 되고, 그래서 국민 모두가 개인적으로 독재보다 민주주의를 좋아한다는 가정이다. 우리 국민 가운데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독재를 칭송하는 정신나간 이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규정과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독재자도 입으로는 (한국적)민주주의를 칭송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런 가정을 해도 좋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집권당이 수십 년 동안이나 대를 물려가며 국민의 입과 귀를 막고,총칼로 양민을 학살하고,비판적 지식인과 노동자를 잡아 가두고 국민의 선거권을 박탈해 체육관에서 똘마니들을 모아놓고 대통령을 뽑는 따위의 독재를 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이기적 개인"들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첫째,독재와 싸운다, 둘째, 가만히 입다물고 지낸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얻으려면 독재와 싸워야 한다. 모든 국민이 한꺼번에 싸우면 민주주의를 얻을 수 있다. 헌데 독재정권을 상대로 싸우는 이게임의 참가자는 실제로는 4천만 명이지만 "이기적 개인"의 관점에서보면 둘뿐이다. "나"와 "남"이다. "나"를 제외한 3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이 모두 "남"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공짜로 얻을 수 없다. 민주화 투쟁을 하는 데 비용이 든다면 말이다. 반정부 유인물을 만들고 시위를 벌이고 사람을 조직하는 모든 활동에는 많은 돈과 시간과 육체적,정신적,노력이 들어간다. 게다가 붙잡히면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살고 학교와 직장에서 쫒겨나고 징역을 살고 나온 다음에도 밥벌이하는데 지장이 이만저만 아니다. 친구와 가족에게도 피해가 갈수 있고 ,운이 없으면 죽거나 불구가 되기도 한다. 반면 누군가 그런 비용을  다 떠맡으면서 독재와 싸운 끝에 민주주의를 얻게 되면 그 혜택은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진다. "이기적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이 반독재 투쟁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나"도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혼자 하다가는 맞아죽기 딱 좋다. 그럼 "남'이 하는 경우에는? 그래도 역시 하지 않는 쪽이 유리하다. "남"이 다 하면 '내"가 하지 않아도 민주주의가 올 것이고, 그러면 공짜로 혜택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무임 승차"행위다.

 

하지만 어쨌든 "남"이야 어찌 하든 "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전략"인 것만은 분명하다. 모두가 이렇게 하면 독재는 영원히 계속된다. 아무도 민주주의를 얻을 수 없다. "이기적 개인의 합리적 행동"은 절대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공동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비합리적 인간들의 미련한 선택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1980년 5월 15일 전두환의 집권음모를 폭로하고 국민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해서 서울역 등 전국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전국 주요 대학의 학생회 간부들은 신군부가 휴교령을 내릴 경우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그런데 5월 17일 밤 신군부가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발표하고 공수부대가 주요 대학의 교정을 점령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오직 광주만의 대학생들만 그 약속을 어느 정도 제대로 실천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시켜 광주시민을 대량 학살함으로써 "민주화 투쟁의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온 국민에게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보여 주었다. 이렇게 "남"은 하지 않는데"나"만 하는 민주화 운동은 "미련한 선택"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피해자들은 1988년 총선에서 여당이 패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했고 "광주보상법"에 따라서 금전적 보상도 받았다.  그 중에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도 피해를 당한 분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사실상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이다. 실제로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거나 징역을 산 분들에게 지급된 돈에는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과 아울러 그들이 스스로 지불한 민주화 운동 비용에 대한 "사후 정산"이 불충분하지만 일부 포함되어 있다.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민주화 투쟁이라는 게임은 "단판 게임"이 아니라 "반복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게임은 "반복되는 게임"이지만, 참가자가 너무 많다, 그래서 모든 (또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면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남"들이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번 반복해도 결과가 금방 좋아지지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와 독재의 싸움은 오랜 세월에 걸쳐 판세의 역전이 거듭되는 장기 전이다.

 

어느 역사를 보나 다 그렇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라도 승리를 거두었을 때 "남"보다 앞서 독재와 싸우고 그 "비용"을 혼자서 감당한 사람들에게 그 비용을"사후 정산" 해줄 필요가 있다. "현재의 비용"을 싸움에서 이긴 다음 정산받을 수 있다고 확실하게 기대할 수있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 보다 그 다음 게임에서는 "이터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용의 사후 정산이 후하게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이기적 개인"도 "미련한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고, 민주주의의 토대는 그 만큼 강력해진다. 

 

우리의 지난날을 보자. 1960년 4월혁명 이후만 보다라도 이런 게임은 30년 이상 전면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단군 이래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로 탄생했다는 "국민의 정부" 시대에도 최소한 국지적으로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나긴 싸움에 인생의 전부 또는 한 시기를 바쳤던 사람들이 치른 비용을 제대로 정산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박정희가 계승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던 4월 혁명 희생자와 유가족들조차도 수십년 간이나 설움고 박해를 받지 않았는가. 부모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딸, 아들에게 하는 충고는 오랜 세월 우리 국민들을 가두어 놓은 "죄수의 딜레마"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서지 마라" "앞에도 서지 말고 뒤에도 서지 말고 중간에만 서라" "데모하면 인생 망친다" 등등 . 역시 이런 게임에는 남들이 어찌 하든 구경암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전략"이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민주화 투쟁을 한 이들은 누구인가? 첫째는 대학생이다. 왜 그랬을까?혈기왕성한 나이에다 책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한다면 대학생들이 "현재적 비용"을 가장 적게 들이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우선 자유시간이 많다. 독재자와 싸우는 방법을 연구하고 유인물을 쓰고 화염병을 제작하고 가두시위를 예행연습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또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도 없고 떨려날 직장도 없으니까  역시 아버지보다는 아들이 하는 편이 들어가는 비용면에서 유리하다.

 

둘째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했다. 그들은 비슷한  학력과 능력을 가진 수 많은 지식인들이 독재정권과 붙어 먹거나 침묵을 지킬 때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닌 "말고 글을 함부로 한 죄"로 무수한 고초를 겼었고, 그래서 건강과 생명을 잃은 분들고 적지 않다. 젊은 지식인 가운데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해가면서 까지 공장에 들어간 이들도 많았다. 이런 이들이 치른 비용은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집단적으로 묶어서 말할 수 없지만 샐러리맨들도 기여한 바가 있다. 평소에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후배들이 찾아오면 밥도 사고 "군자금"도 주었다. 그리고 비판적 지식인들이 쓴 책을 구입함으로써 그들이 먹고 사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 "남"들이 다들 하기 때문에 기꺼이 "남"들 만큼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명동 거리로 몰려나온 "넥타이 부대"의 주력도 그들이다. 그 밖에 이런저런 물질적, 정신적 성원을 보낸 "시장 아줌마" 나 평범한 시민들도 저마다 조금씩 비용을 분담했다. 천주교회를 비롯한 여러 종교단체들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건 공동선을 추구하는 종교단체 본연의 역할를 한 것으로 존중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여야가 "민주화 운동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것은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에 그리 큰 애정과 관심을 쏟는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 때문에 무척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1991년 시위 도중 전투경찰에 맞아 숨진 명지대생 故 강경대 군의 부친 강민조 씨는 15억 원의 전재산을 털어 사회복지법인을 세웠다.

 

그런데 이 법인의 설립 목적에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느라 생활이 어려운 가족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벌인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비슷한 일화는 그 외에도 많다. 유신과 5공 시대의 재야 민주인사 가운데 한 사람인 계훈제 선생이 중병으로 1999년 별세하셨는데, 마지막 까지 병간호를 맡았던 이는 1980년 숭전대학교(현 숭실대)총학생회장이었던 윤여연 씨였다.윤씨도 자신도 고문과 감옥생활의 후유증 때문에 건강이 말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아름다운 일처럼 보이지만 입맛이 이만저만 쓰지 않았다. 민주화를 위햇서 수십년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사람과 그 가족들이 병고와 생활고에 허덕이고, 그 중에서 그나마 능력이 있는 분들이 재산을 털어서 서로를 돕는,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 나라가 정말 "민주공화국"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나는 "역사 바로 세우기"나 민족정기의 수립"을 위해서 민주화 운동 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 "돈 버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 운동권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경제정의의 실현"을 요구한다. 비록 아직은 반쪽짜리라고는 하지만,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우리의 민주주의는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나"는 싸워야한다는 "미련한 선택"을 한 "비합리적 인간"들의 피눈물을 먹고 자란 나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은 이 "미련한 인간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이 빚을 확실하게 갚아야만 우리 사회도 또다시 파시즘의 덫에 걸릴 경우 옛날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처자식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고  기꺼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보상법"은 이런 면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든든한 보루가 될 것이다...

 

출처 : 우리가 미련한 인간들에게 진 빚--유시민
글쓴이 : 강 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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